[시사진단] 한반도 탈출기, 한반도발(發) 국제주의(김태균, 그레고리오,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가톨릭평화신문)




한반도의 평화 구축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며 과연 어디가 종착역인가? 우리는 언제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현실주의적 국제 정세의 덫에 파묻혀 우리의 운명을 외세의 결정에 맡길 것인가? 한국이 한반도에서 평화를 주도하고 북한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한반도라는 좁은 지정학적 테두리에서 탈출하여 국제 사회의 보편적 질서(order)와 정의(justice)를 한반도로 유입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한반도에서 탈출해야 한다. 한반도 탈출기는 국제 관계에 대한 사고의 폭을 한반도에 국한하지 않고 한반도를 국제 사회의 관점에서 조망함과 동시에 국제주의의 보편적 자유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를 적극적으로 한반도의 평화작동 기제로 확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 NATO와 같은 지역 단위의 안보 시스템을 아시아에 적용하지 않고 이른바 ‘hub-and-spoke’라는 미국 중심의 양자 동맹시스템을 아시아 안보 체제의 토대로 주입한 이후, 동아시아에서 다자주의와 국제주의에 기초한 안보ㆍ경제 협력의 시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국제주의를 선도하지 않으면 한반도 및 동아시아에서 어느 국가도 다자주의를 시도할 이유가 없으며, 앞으로도 고루한 양자동맹 중심의 신냉전 구도가 한반도의 질서관리 시스템으로 이어질 것이다.

한반도 탈출기는 한반도에 배태된 현실 정치를 무시하고 그냥 무작정 한반도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유지해 온 양자 동맹 중심의 4강 외교를 지속해 나가되, 동시에 국제주의적 사고와 원칙을 한반도에 적용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한반도에서 시작하는 국제주의를 국제 사회에 다시 되돌려 주는 ‘한반도발(發) 국제주의’를 주창하자는 것이다. 군축, 비핵화, 갈등 예방, 평화 구축, 사회 통합 등 한반도 분단 상황을 통해 우리가 주체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평화 담론을 개발하고 이를 국제사회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다소 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급진적인 국제주의만이 한국이 처한 양자 중심의 안보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다. 현재 한반도 주변 강국들은 자국 중심의 외교 정책을 관철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기존의 자유 국제질서를 무시하는 외교 행위도 일상화되고 있다. 이러한 악조건이 우리에게는 뉴노멀이자 동시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평화, 인권, 민주주의, 인도적 개입 등의 인류 보편적 가치를 강조하는 공공외교와 평화외교를 한반도, 동아시아, 그리고 국제사회에 한국이 공격적으로 전달할수록 적대적 동맹관계로 점철된 한반도의 갈등과 위기 상황을 오히려 상쇄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조건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해, 한반도의 미래를 한반도에 국한된 생존의 문제로 제한하지 않고 국제 사회의 규범과 자유 국제질서의 위기로 환치해 글로벌 규범과 원칙을 생산ㆍ보호하는 데 한국이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지금은 마치 평화와 민주주의의 상징인 북유럽 국가가 동아시아에서 한국으로 환생하는 상상력을 동원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