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진단] 다자주의 안에서 지연된 정의(오현화 안젤라, 가톨릭기후행동 공동대표)

(가톨릭평화신문)



‘다자주의’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여러 국가가 협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국가 간 무역, 무기확산금지, 환경 등의 의제에 다수의 나라가 협약을 체결하고 구체적인 실행계획들을 논의하는 것이다.

제16차 유엔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총회(COP16)가 10월 22일~11월 2일 콜롬비아 칼리에서 개최됐다. 생물다양성협약은 1992년 지구정상회의(리우회의)에서 채택된 국제협약이다. 이번 회의에서는 2022년 총회에서 채택된 ‘쿤밍-몬트리올 글로벌 생물다양성 프레임워크’의 기금 조성과 운영방법, 협약국의 생물다양성 보호 로드맵 모니터링 방안 구체화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 안건들은 처리되지 못하고 총회는 폐회 시점을 넘긴 11월 2일 토요일 아침 흐지부지 끝나게 된다. 항공권을 변경할 예산이 없는 많은 개발도상국이 회의를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것이다. 정작 중요한 논의를 제일 뒤로 미뤄서 논의를 마무리할 수 없었다며 많은 사람이 한탄했다.

성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이번 총회에서 당사국들은 ‘원주민과 지역사회에 관련된 문제’를 전담하는 보조기구로서 ‘원주민 상설 협의체’를 신설하기로 합의했다. 유엔에서는 앞으로 전 세계 원주민들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다며 성과를 자축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1998년 ‘나고야 의정서’ 생물다양성 협약에 원주민과 지역 공동체의 권리, 전통 의식을 인정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이후 26년 만에야 다다른 것이다. 무려 26년 만에!

국가 간 협상의 지연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국내 정치에서 여야가 법안 줄다리기하는 것 이상으로 국제정치에서는 너무도 기나긴 논의가 이어진다. “아쉽게도 무산되었습니다”라는 짤막한 보도 뒤에는 협상 테이블에서의 지난한 과정과 노력이 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11월 11~22일 열리는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는 어떤 결과가 채택될지 우려와 기대를 동시에 품고 있다. 기후위기는 나날이 심각해지는데 미국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화석연료 퇴출 로드맵이 안갯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11월 25일부터 부산에서는 플라스틱 협약 제5차 정부간협상위원회가 개최된다. 과연 플라스틱 퇴출을 위한 국가 간 협약을 마련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한다.

결과가 실망스럽거나 정의가 지연된다고 좌절하기엔 우리의 상황이 여유롭지 않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낡은 다자주의를 재구성해 ‘아래로부터 나오는’ 다자주의로 나아가야 함을 당부하신다. “전 세계의 다양한 국가에서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고 동반하는 자리인 아래로부터 생겨나는 요구들이 권력의 요인들에 압력(「하느님을 찬미하여라」 38항)”을 줘야함을 호소하신다. 바로 그 자리에 우리가 초대됐다.

이제는 이 낡은 다자주의에서 지연된 정의를 바로잡을 때다. “이는 순진한 이상향(Utopia)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 고귀한 목표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모든 형제들」 190항)

“사랑의 모든 행동 다른 이들을 향한 진심 어린 관심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행동은 하나도 헛되지 않습니다. 아낌없는 노력은 무의미하지 않으며, 고통스러운 인내는 쓸모없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생명의 힘처럼 세상을 감돌고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 279항)



오현화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