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걷고 기도하고] 수원교구 미리내성지

(가톨릭신문)

미리내는 은하수(銀河水)의 순우리말이다. 박해를 피해 모여 살던 신앙 선조들의 집에서 흘러나온 호롱불과 밤하늘의 달빛, 별빛이 시냇물과 어우러진 모습이 은하수 같다고 해 붙여진 예쁜 지명이다. 성지 입구에서 성 김대건 신부의 묘소가 있는 기념성당까지는 어른 걸음으로 20여 분. 색동옷 갈아입은 만추(晩秋)의 숲길 따라 묵주기도의 신비를 담은 커다란 조각들이 길동무처럼 안내한다. 묵주 꺼내 손에 쥐고 한 걸음 내딛는다.



†.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성인이 고향도 아닌 왜 이곳에 묻힌 것일까.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1846년으로 돌아가야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미리내에 살던 17살 청년 이민식(빈첸시오)은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접하고 유해만이라도 수습하겠다 마음먹고 새남터로 달려갔다. 그리고 성인의 순교 40일 만인 10월 26일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유해를 모시는 데 성공했다. 그는 유해를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험한 산길로만 150여 리를 밤에만 걸어 닷새째 되는 날인 10월 30일 미리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널따란 잔디광장의 끝에 김대건 신부 동상 그리고 그 너머 언덕에 1928년 봉헌된 ‘김대건 신부 기념성당’이 있다. 성당 앞뜰에는 왼쪽부터 강도영 신부(미리내본당 초대 주임),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조선교구 3대 교구장), 최문식 신부(미리내본당 3대 주임) 등 네 성직자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김대건 신부의 옛 무덤이다. 성인의 유해는 1901년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960년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에 안치됐다. 현재 미리내성지는 성인의 아래턱뼈 등 유해 일부를 모시고 있다. 무덤 앞에서 두 손 모으고 성인의 넋이 깊이 스며 배인 진토(塵土) 위에 경당이 들어서고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는 오늘에 감사를 드린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상과 ‘성모 마리아의 일곱 가지 기쁨’(성모칠락) 벽화가 이채로운 성모당을 지나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으로 향한다. 성인의 종아리뼈를 모신 제대 위로 성령과 성모님 그리고 김대건 신부와 성인들의 모습을 담은 유리화가 하늘을 향해 뻗은 모습이 눈길을 끈다.



†. 성전 뒤 십자가의 길을 지나 맨 처음 묵주기도를 시작했던 자리로 돌아왔다. 한국 순교 성인 복자상과 김대건 신부가 사목하던 조선 시대의 성문 형상으로 지어진 성체조배실이 있다. 성체조배가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가장 좋은 길. 성문의 이름이 ‘천국문’(天國門)인 이유다.


성체조배실 너머로는 또 다른 성당이 아름드리나무 아래 들어서 있다. 1907년 봉헌된 미리내 성 요셉 성당이다. 성당은 한국교회 세 번째 사제 강도영 신부의 얼이 서린 곳이다. 1896년 사제품을 받고 첫 소임지로 미리내에 온 강도영 신부는 33년간 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며 성 요셉 성당 뿐 아니라 애국계몽운동의 성격을 띤 해성학교를 설립했고 농촌개혁에도 선구적 역할을 했다.




†. 성지를 나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 순례길 함께한 신앙 선조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부르심에 응답했고 그 때문에 피로써 신앙을 증거한 목자 성 김대건 신부. 목자의 마지막 길을 편히 모시고자 목숨을 걸고 유해를 짊어진 이민식의 열렬한 신심. 그리고 선배 목자의 순교를 모범 삼아 사목에 충실하며 헌신한 강도영 신부.


때와 곳 가리거나 탓하지 않고 순명의 마음으로 부르심에 응답한 신앙 선조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미리내가 순례자들의 기도와 묵상의 성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들처럼, 아브라함처럼, 모든 것 내어놓은 채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 여기 있습니다”(창세 22,1 참조)라 답할 수 있는 용기 주시길…성모님과 성인들에게 전구를 청한다.



◆ 순례 길잡이 


- 수원교구 미리내성지(www.mirinai.or.kr)


- 미사 : 주일(오전 11시, 오후 2시), 화~토(오전 11시 30분)


- 유해 친구식: 매월 첫 금요일 미사 중


- 순례 문의 : 031-674-1256


 


이승환 기자 ls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