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가톨릭신문)

■ 신앙 언어, 유일하고도 불완전한 도구


신앙은 체험에서 출발합니다. 체험이 신앙이 되려면, 어떤 의미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해석된 체험이 이야기(발화)되어, 신앙은 전해지고 기억이 재생산됩니다. 신앙은 체험이고, 체험의 해석이고, 여러 사람이 빚어낸 해석의 나눔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수적인 도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언어입니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체험을 포착하고, 해석하고, 발화하며, 보존합니다. 언어는 체험과 기억을 담아내는 그릇이므로, 본질이 아니라 도구(수단)입니다. 하지만 신앙행위는 언어 없이 벌어지지 않으므로 본질적 도구입니다. 게다가 언어는 다른 도구가 없는 유일한 도구이지요. 신앙에 있어 언어는 대체 불가능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유일한 도구라고 해서 완전한 도구는 아닙니다. 언어는 불완전합니다. 성서에는 첫 번째 신앙인들의 하느님 체험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읽는다고 그들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언어는 시대에 얽매여 있지요. 수천 년 전 사람들은 삶의 모습과 사고방식이 우리와는 완전히 달랐고, 언어에는 시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를 아무리 잘 번역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바로 와닿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 묵시문학, 예수님 시대 사람들의 언어


서설이 길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르 13,24-25) 이런 투의 언어를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묵시문학은 기원전 2세기 유다인들이 만든 문서입니다. 성전(聖殿)의 파괴,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 전쟁과 반란 등은 모두 유다교 묵시문학의 주제들이었습니다. 첫 번째 신앙인들은 묵시문학에 아주 익숙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말할 때, 당연히 묵시문학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묵시문학의 표현들을 가져다 쓰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언어의 이면에는,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첫 번째 신앙인들의 체험도 있습니다. 기원후 66년, 유다인들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전쟁은 4년 뒤, 완전한 패배로 끝이 났습니다. 로마제국은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어버립니다. 예루살렘의 성전도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첫 번째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그리고 자신들을 박해하던 유다인들의 몰락을 보면서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던 ‘그날과 그 시간’을 떠올렸던 것이겠지요. 그렇게 그들은 물려받은 언어로 신앙을 표현했고, 자신들의 체험과 믿음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파국 이후에도 일상이 이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이 남긴 언어를 더듬어가며 그들의 체험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두워진 해와 빛을 잃은 달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일식과 월식은 지루한 일상에 소소한 재미를 주는 일이지요. 혜성의 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이 위에 말라붙은 문자가 시간과 공간을 건너 다리 놓고자 합니다만, 그 사이는 너무나도 멉니다. 어제의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외치고 있으나 우리는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그들의 시대에는 분명히 잘 작동했을 겁니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나고 지구 반대편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등불에 마음을 기대놓고 펜으로 이야기를 수놓아가는 복음사가는, 2000년 후 지구 반대편에서 이야기를 마주할 우리를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의 질문을 도모하지 않았을 겁니다.


■ 일상과 성찰: 신앙언어가 담아야 하는 것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그곳에는 무화과나무가 지천으로 널려있고 어디서나 잘 자랐다고 하지요. 유다인들은 그 그늘에서 쉬고 어울리며, 그 열매로 허기를 달랬을 겁니다. 말하자면, 무화과나무는 일상 그 자체였던 셈이지요. 구약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무화과나무’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일상과 자신을 성찰하라는 말로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은 복음사가의 일이기도 했습니다. 복음사가는 당대를 읽고, 그런 읽기에서 나온 성찰을 언어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언어가 낡고 빛바랬을지라도, 시대를 읽고 신앙을 성찰한 그들의 노력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모범이 됩니다. 우리는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활동’을 본받아 우리 시대의 신앙을 찾아 나갈 수 있겠지요. 우리의 일상을 유심히 읽으며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는 이런 순간을 ‘묵시문학적’ 순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은사 신부님이 소임하시는 성당에 가는 길에는 예배당 건물을 그대로 살린 카페가 있습니다. 지을 때는 하느님의 집이었겠으나, 팔 때는 교회건물이었을 그 카페를 보면서, 오늘의 종교현실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내일을 가늠합니다. 이웃 교구는 점점 고령화되고 소멸되어 가는 농촌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웃 교구의 형제들과 만나, 공동체의 상황과 고민을 나눌 때면, 그들은 이미 교회의 미래를 살고 있다고 느낍니다.


제가 찾은 그런 순간들이 여러분에게도 있겠지요. 많은 신앙인들이 일상에서 길어낸 깨달음을 살아있는 언어에 담아 고백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런 언어들이 쌓여 대화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런 언어로 담론을 엮어가는 곳에서, 파국 너머의 신앙이 싹틀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