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토(Benedictus, 7월 11일)의 쌍둥이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480년경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의 누르시아에서 부유한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신심 깊은 가정에서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한 사람으로 살아왔으나 아마도 부모의 집에서 기거한 듯 보인다. 그 후 그녀는 오빠인 성 베네딕토가 수비아코(Subiaco)의 한 동굴에서 은수자로 생활할 때 오빠처럼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할 결심을 하고 여러 귀족 청년들의 청혼도 모두 거절하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자기 몫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후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와 멀지 않은 곳에 초막을 짓고 은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가 처음부터 혼자 생활했는지 아니면 공동생활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점차 그녀와 같이 생활하려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 당시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오빠인 성 베네딕토를 만나 기도 생활의 도움을 받은 것 같다.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 1세(Gregorius I, 9월 3일)가 쓴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화집” 제33장에 의하면, 성 베네딕토가 몬테카시노에 대수도원을 설립한 뒤 그곳에서 남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피우마롤라(Piumarola)에 베네딕토 수녀원을 설립하여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에게 맡겼다. 그래서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 1세의 “대화집” 제33장에는 이들 남매의 유명한 일화가 하나 전해져 온다. 성녀 스콜라스티카가 마지막으로 성 베네딕토를 방문했을 때 성녀는 예년과 같이 수도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성 베네딕토가 몇몇 수사들을 데리고 나와 수도원에서 약간 떨어진 어느 집에서 만났다. 그들은 만나서 늘 하던 대로 함께 기도하고 영적 담화를 나누었다. 밤이 되자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오빠에게 다음 날 아침까지 함께 있기를 간청했으나 성 베네딕토는 수도회 규칙에 충실해야 한다며 거절하였다. 그래서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잠시 기도하자 곧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서 성 베네딕토와 수도승들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대로 머물게 된 성 베네딕토는 “누이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의 뜻을 허락하셨구나. 대체 네가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고, 성녀는 “오빠는 제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주님께서는 제 말을 귀담아들으셨습니다. 자, 이제 나가서 수도원으로 돌아가 보시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해서 남매는 밤새도록 영적인 생활과 천상 생활의 기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집” 제34장에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빠와의 마지막 만남이 있은 지 3일 후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선종하였다. 이날 성 베네딕토는 수도원에서 기도하던 중 창밖으로 동생이 있는 수녀원에서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동생이 하느님께로 돌아갔음을 알게 되었다. 성 베네딕토는 누이동생의 시신을 자신을 위해 몬테카시노 수도원 내에 마련해 두었던 무덤에 안장했다고 한다.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이 무너진 후 8세기경에 성 베네딕토와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유해는 프랑스 중부 플뢰리(Fleury)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면서 이탈리아 지역 밖에서도 성녀 스콜라스티카에 대한 공경이 확산하기 시작했다. 8세기 말에는 베네딕토회의 시간 전례(성무일도)에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축일이 수록되었고, 9세기경에는 전 세계 수도원에서 이 축일을 기념하였다. 성녀 스콜라스티카에 대한 공경 예절이 전 세계의 교회로 확산하게 된 것은 11~13세기에 이르러서였지만, 로마 보편 전례력에 정식으로 축일이 수록된 것은 18세기경이었다.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주보 성녀로 공경받고 있고, 비둘기는 그녀의 상징이 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모두 2월 10일 목록에서 그녀에 대해 전해주며, 특별히 성 베네딕토와의 마지막 만남과 죽음에 대해 기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