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루카 11,9-10 참조)
이 말씀을 들으면 나의 모든 기도가 들어질 것처럼 여겨지고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경우 나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내지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등의 성경 본문은 의도적으로 ‘누가’ ‘무엇’을 주는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는 종말론적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는 전형적인 표현 방식입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9-11; 루카 11,11-13 참조) 이어지는 이 말씀은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발견하는 것이 기도에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가보다 더 중요함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마음’이 하느님의 핵심 본질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신 아버지와 같은 분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우리의 바람이 들어지리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인 자세를 떨치고 하느님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실 때,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라는 걱정으로부터 해방되어 부모의 보호 아래 사는 어린이들처럼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마태 6,25-34 참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여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기도할 때 믿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 21,21-22; 마르 11,22-24; 루카 17,6 참조) 하지만 기도는 ‘하면 된다’는 식으로,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을 통해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 빵과 생선을 주되, 돌과 뱀을 주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거울삼아 우리가 청한 것이 과연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지 반문할 수 있습니다. 또 산을 옮기는 대신 산을 돌아갈 용기와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기도로 다 이루어지니 우리가 일을 할 필요가 없을까요? “기도할 때는 마치 하느님만이 계신 듯이, 일할 때는 마치 자기만이 있는 듯 행하라!”는, 루터 내지 이냐시오 로욜라로 소급되는 영성 원칙이 있습니다. 기도는 은총의 영역에, 활동은 윤리의 영역에 속합니다. 둘은 각각 고유하며 서로 배타적으로 보이지만 두 가지 자세는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를 설명하고 서로를 풍요롭게 합니다. 하지만 청원 기도를 드릴 때는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solo dios basta)라는 데레사 성녀의 단순한 기준, 그분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제가 옮길 수 없는 ‘산’을 돌아서 갈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제가 그를 통해서 무언가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제 자신의 ‘산’을 옮길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또 제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지혜를 주소서! (어느 수인)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