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사도좌 제대 위에 걸린 79위 복자화. 시복 선언과 함께 휘장이 걷혀 신자들에게 공개됐다. 가운데는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 그 오른쪽 바로 옆에 무릎 꿇은 이는 김대건 신부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승리와 영광의 날이다. 하느님께 찬미!’
한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복자가 탄생한 1925년 7월 5일. 경성(서울)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일기 첫머리에 쓴 말이다.
1877년 사제품을 받자마자 한국 순교자 시복을 위해 반백 년을 열심히 달려온 뮈텔 주교. 그는 이날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에 참여했다.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와 「경향잡지」 발행인 한기근 신부, 그리고 장면(요한 세례자)·장발(루도비코) 형제도 함께였다. 이들이 남긴 시복식 기록을 보면 지금도 그 감동이 생생하게 전해온다.
100년 전 시복의 기쁨을 되새기고자 당시 자료를 토대로 그날을 재현했다.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7월 5일 오후 6시 시작한 성체 강복. 시복 이후이기에 사도좌 제대 위 휘장이 걷혀 79위 복자화가 보인다. 복자 성해함을 현시하는 제대 앞에 비오 11세 교황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오전·오후로 나뉘어 거행된 시복식
주일인 7월 5일은 화창했다. 시복식이 거행될 장소는 대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인 압시드. 반원형 공간으로, 후진(後陣)이나 앱스라고도 한다. 복자의 성화와 유해를 현시할 성 베드로 사도좌(Cathedra Petri) 제대가 위치한 곳이다. 벽면에 금실로 장식한 붉은 비단을 길게 드리우는 등 시복식을 앞두고 화려하게 단장했다.
당시는 오전·오후 두 번에 나눠 시복식을 진행했다. 오전 예식은 시복을 선언하는 교황의 소칙서가 반포되는 시간이다. 한국 순교자 79위는 제259대 교황 비오 11세(재위 1922~1939)가 시복했다.
다만 교황이 칙서를 직접 읽는 시성식과는 달리, 시복식은 대성전 참사회원(의전사제)이 대신 낭독했다. 교황은 성체강복을 거행하는 오후 예식 때에만 대성전에 입당했다. 새 복자를 공경하고, 전구를 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자 보편 교회 목자가 직접 참여하는 만큼 오전보다 더 많은 인원이 참석했다.
참고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황이 직접 시복 선언을 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관례는 사라졌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1971년 10월 17일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 시복식에서 처음 선보였다. 교황이 집전한 첫 시복식이기도 했다.
예부성성 추기경과 대성전 수석사제 입당
오전 예식은 10시부터였지만, 이른 새벽부터 인파가 몰려들었다. 1925년 정기 희년과 선교 박람회를 맞아 로마는 순례자들로 붐볐다. 대성전 안팎에 79위 순교 복자화 다섯 점이 걸렸다. 그러나 아직 복자가 아니므로 모두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시복이 선포되면 공개될 예정이었다. 그 ‘영광’의 순간을 보기 위해 1만 명이나 되는 신자가 성 베드로 대성전에 자리 잡았다.
뮈텔·드망즈 주교는 9시 30분 대성전 제의실에 도착했다. 한기근 신부와 장발은 떨리는 마음으로 ‘복자 가족석’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장 기낭(Guinand) 신부가 있었다. 아파서 오후 예식에만 참여한 장면까지 포함해 한국 교회 대표는 이렇게 6명이 전부였다.
압시드 왼편에 있는 복자 가족석은 사도좌 제대와 가까운 특별석으로 예식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이름과 달리 79위 복자 친족 중 참여자가 없어 한국 교회와 파리외방전교회 관계자가 그 자리에 앉았다. 기낭 신부를 비롯해 전교회 소속 신부는 최소 11명이었다. 신학생 3명과 수사 1명도 동참했다.
드디어 10시 정각이 되자 제복을 입은 시종을 앞세워 추기경 5명이 입당했다. 예부성성(현 시성부) 장관 비토(Vito) 추기경과 위원들이었다. 대주교·주교와 대성전 참사회원 등이 뒤따랐다. 장엄 미사를 주례할 멤피스 명의 주교인 발보네시(Valbonesi) 주교도 있었다. 이는 참사회원의 특권이었다. 마지막으로 성 베드로 대성전 수석사제 메리 델 발(Merry del Val) 추기경이 대성전에 들어왔다.
예부성성 추기경들은 압시드 왼편에, 대성전 수석사제와 참사회원·주교단은 오른편에 앉았다. 이날 참여한 주교 가운데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은 뮈텔·드망즈 주교 말고도 2명 더 있었다. 전교회 총장 드 게브리앙(de Gubriant) 대주교와 베트남 빈대목구장 엘루아(Eloy) 주교였다.
한국 79위 복자 탄생과 ‘영광’ 발현
주역이 다 모였다. 남은 건 관례적 절차였다. △시복 청원인이 예부성성 차관과 함께 장관에게 소칙서를 바치며 반포를 명해달라고 요청하고, △예부성성 장관은 청원인과 차관을 대성전 수석사제에게 돌려보내 낭독 허락을 받아 오도록 한다. △수석사제가 허락하면 대성전 참사회원이 소칙서를 낭독한다.
79위 시복 청원인은 파리외방전교회 로마대표부 가르니에(Garnier) 신부였다. 그는 예부성성 차관 베르데(Verde) 몬시뇰과 함께 위 절차를 수행했다. 가르니에 신부는 뮈텔 주교와 함께 79위 순교자 시복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다. 로마에서 2년간 휴가도 없이 열심히 일해 시복 소송을 성공적으로 이끈 데다 시복식 준비까지 도맡았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참사회원 체레티(Cerretti) 몬시뇰이 사도좌 제대 왼편 강론대에 올랐다. 그리고 체레티 몬시뇰은 비오 11세 교황이 79위 시복을 선언하는 소칙서를 힘차고 또렷한 목소리로 낭독했다. 한국 교회 역사상 최초로 복자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곧장 사도좌 제대 상단에 장식된 ‘영광’의 황금빛 타원형 창을 가린 휘장이 걷혔다. 79위 복자화가 수백 개 전등이 발하는 환한 빛을 받으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영광의 발현’이라고도 한다. 그림의 주인공은 주교 복장을 갖춘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와 동료 순교자들. 그 위로 옥좌에 앉은 그리스도와 승리의 종려나무를 든 천사들이 보였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시복의 영광을 감격에 젖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것은 감탄이었다. 어떻게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뮈텔 주교가 남긴 말이다. 드망즈 주교 역시 “그 감동은 컸다”고 했다. 장발 화백도 “우리 가슴은 북받치는 격렬한 감동에 찢어지는 듯했고, 두 뺨에는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고 적었다.
대성전 종소리가 로마와 전 세계에 기쁜 소식을 알렸다. 참사회원 발보네시 주교가 사도좌 제대 앞에 무릎 꿇은 채 ‘성 암브로시오의 사은 찬미가(Te Deum)’를 선창했다. 신자들도 웅장한 파이프오르간 소리에 맞춰 힘차게 따라불렀다. 그동안 가르니에 신부와 조선·만주 선교지 대표 제라르(Grard) 신부는 바쁘게 움직였다. 파리외방전교회 신학생들과 함께 추기경 이하 귀빈에게 복자 전기와 상본을 나눠줬다.
사은 찬미가 다음으로 새 복자에게 전구를 청하는 첫 기도 소리가 대성전 안을 메웠다. “복자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와 안드레아(김대건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기도문에는 사제 성소가 더 풍성해지길 간 내용도 담겼다.
복자 유해를 모신 화려한 성해함도 공경을 위해 사도좌 제대 위에 현시됐다. 사제 4위(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김대건 신부)로, 뮈텔 주교가 조사하고 분배해 로마로 가져왔다.
발보네시 주교는 복자 유해에 분향한 뒤 장엄 미사를 거행했다. 노래로 미사를 집전하는 그의 목소리가 파이프오르간과 훌륭한 화음을 이뤘다. “실로 천상의 노래가 아닌가 의심하겠더라.” 한기근 신부는 「경향잡지」에 연재한 ‘로마여행일기’에 이렇게 표현했다. 대성전 전속 성가대 ‘카펠라 줄리아’가 부르는 순교자 찬가 역시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정오 무렵 예식이 끝났다. 수백 명이 대성전에 남아 복자화를 감동 어린 시선으로 구경했다. 몇몇 신자는 한 신부와 장발을 알아보고 서로 눈짓하며 “저 사람들도 한국인이지?”라고 속삭였다. 두 사람에겐 이런 관심 또한 마냥 기쁜 경험이었다.
로마대표부로 돌아간 뮈텔·드망즈 주교는 12시 30분 시복 소식을 애타게 기다릴 서울대목구로 전보를 보냈다. 이튿날 전보가 도착하자 부대목구장 드브레드(Devred) 주교는 「경향잡지」에 전문을 실었다. “지극히 기쁜 중에서 시복식을 거행하였고 교종(교황)께서는 성부의 지극한 자애를 나타내시다.”
교황 삼층관을 쓴 채 의전용 가마 ‘세디아 제스타토리아’에 타고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입당하는 비오 11세 교황.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오후 예식에 참여했다.
비오 11세 교황, 한국 복자 공경
오전보다 짧지만, 더 성대한 성체강복식은 오후 6시에 시작됐다. 비오 11세 교황에게 받은 특권으로 뮈텔 주교가 집전했다. 한 신부가 주교관(Mitra) 복사를 했다. 성체강복은 원래 교황이 거행하는 것이지만, 복자 출신 교회 주교에게 허락하기도 했다. 보름 전인 6월 21일 캐나다 순교자 8위 시복식 때에도 몬트리올대교구 보좌 주교가 성체강복을 집전했다.
6시가 되자 은나팔 소리와 함께 비오 11세 교황이 지금은 볼 수 없는 교황 삼층관(Tiara)을 쓴 채 의전용 가마(Sedia Gestatoria)를 타고 입당했다. 교황청 국무원 총리 가스파리(Gasparri) 등 추기경 18명과 주교 15명도 화려한 행렬에 동행했다. 신자들은 손수건을 흔들고 ‘교황 만세’를 외치며 열렬하게 맞이했다. 교황도 손을 들어 양 떼를 강복하며 화답했다.
교황은 ‘영광’ 속 복자화를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가마에서 내린 뒤 사도좌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우리 신앙 선조를 향해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가 경의를 표하는 복된 순간이었다. 교황을 따라 대성전에 모인 2만 군중도 무릎을 꿇고 새 복자에게 전구를 청했다. 머나먼 동쪽 땅에서 ‘사학죄인’으로 죽임당한 순교자들은 이제 모든 신자에게 공경받는 존재가 됐다.
한국 교회와 파리외방전교회 관계자 총 25명이 79위 시복식 이튿날인 7월 6일 비오 11세 교황을 알현후 찍은 단체사진.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교황 “황사영 「백서」 고맙다”
성체강복에 앞서 뮈텔 주교는 간절한 목소리로 새 복자를 위한 기도를 노래했다. 대성전 안은 감동적인 침묵으로 가득 찼다. 성체강복 후 마지막에 시복 청원인 가르니에 신부가 교황에게 복자 성해함을 선물했다. 고딕풍으로 만든 금제 감실 모양이었다. 장미·백합 꽃다발과 상본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 역사학자 로네(Launay) 신부가 쓴 복자 전기도 봉정됐다. 최신작인 「1925년 시복된 1838-1846년 프랑스와 조선의 순교자들」이었다.
드 게브리앙 대주교와 한국 교회 주교·신부도 교황을 알현하고 강복을 받았다. 전날에 이은 두 번째 알현이었다. 교황은 뮈텔 주교에게 “황사영 「백서」를 읽었다”며 “제공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뮈텔 주교는 첫 알현에서 교황에게 「백서」 원본과 자신이 쓴 프랑스어 번역본을 바쳤다. 교황은 또 「순교록(Martyrologium)」에 한국을 새로 삽입하게 돼 고맙다고 전한 뒤 다시 가마에 탔다. 그리고 환호하는 신자를 강복하며 사도궁(교황궁)으로 돌아갔다. 오후 7시경이었다.
한국 교회 첫 시복식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여운이 남은 뮈텔 주교와 일행은 79위 복자화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대성전 조명이 다 꺼질 때까지.
‘더이상 열망할 것이 없었고 모두가 기뻐했다. 하느님과 조선 순교 복자들에게 찬미가 있기를!’ 「뮈텔 주교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