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 하나]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가톨릭신문)

“명절에 부모님께 잘 인사드리고 기쁜 시간 보내. 나는 이제 부모님이 안 계신 고아야.”


부모님 두 분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선배 신부님이 명절을 앞둔 후배 신부들에게 건넨 말입니다. 웃으며 하신 말씀이었지만, 그 안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라는 당부입니다. 사실 저 역시 부모님의 연로하신 모습을 떠올려보면, 선배 신부님의 이 말이 더 이상 가볍게 들리지 않습니다. 짧은 표현이지만 그 속에 담긴 부모님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 애틋함, 슬픔과 같은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당장 수녀원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모현상실수업’에서 함께 강의를 들었던 수녀님의 고백입니다. 수녀님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당장 달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종신서원식을 바로 앞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수녀님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프신데 곁에서 돌보지 못하는 이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결국, 고민 끝에 수도회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날 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은 그 순간이 마치 아버지께서 “고민하지 말고 너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느껴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자책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성직자와 수도자에게도 상실의 고통은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신자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교회공동체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가는 이들이라도, 상실의 고통을 당연한 듯 담담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기억과 감정은 누구에게나 마음 깊은 곳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도의 시간과 작업이 필요합니다. 곧, 사랑하는 이와 함께했던 시간 속에 켜켜이 쌓인 기억과 감정을 잘 정리해야만 합니다. 단순히 외면하거나 잊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마음의 깊은 서랍에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어 바라볼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다시 달아두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기억이 다시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누었던 사랑은 여전히 삶의 원동력이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15)


기쁨과 마찬가지로 슬픔도 함께 나누는 공동체, 그것이 바로 교회공동체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함께 흘리는 눈물은 우리를 절망 속에 주저앉게 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상실의 고통 앞에서, 누구나 눈물 흘리고 또 희망할 수 있는 ‘치유의샘’의 문을 용기 내어 두드려보시지 않겠습니까?



글 _ 허규진 메르쿠리오 신부(수원교구 제2대리구 복음화3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