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8월 뉴욕에서 열린 제68차 최고회의에서 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 장면(왼쪽)이 당시 최고 기사였던 존 E. 스위프트(John E. Swift)에게 K of C 회원 핀을 보여주고 있다. 콜럼버스 기사단 멀티미디어 아카이브
대한민국 초대 주미대사에 이어 제2공화국 총리를 지낸 장면(요한 세례자) 박사가 1949년 세계 최대 가톨릭 신심단체 ‘콜럼버스 기사단’에 한국인으론 처음 가입했던 사실이 확인됐다. 이러한 신앙 네트워크를 통해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장면 박사가 미국과 국제사회에 북한 침략을 알리고 군사적 지원을 이끌어 내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내용은 콜럼버스 기사단 홈페이지(https://www.kofc.org)에 ‘역사를 형성한 기사들’ ‘기사와 한국전쟁’이라는 제목의 기사로도 자세히 소개돼 있다.
내용을 보면,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한 후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된 장면 박사는 1949년 12월 미 워싱턴 D.C.에서 열린 콜럼버스 기사단 ‘워싱턴 평의회 224(Washington Council 224)’에 가입해 한국인 최초로 기사가 됐고, 1950년에는 ‘워싱턴 평의회 224’ 소속으로 최고회의에 참석해 활동했다.
장면 박사는 특히 1949년 북한의 잦은 도발과 남침 준비가 본격화되자 미국 내 150만 명에 이르는 콜럼버스 기사단의 영향력과 역할에 주목해 기사단과 적극 교류했고, 이는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지자 빛을 발했다.
장면 박사는 전쟁이 시작되자 콜럼버스 기사단이 북한의 침략을 강력히 규탄하고 대한민국에 대해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지지(loyal and unreserved support)’를 결의하도록 이끌었으며, ‘소련 정부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미군의 추가 동원(further mobilization)’을 지지하는 결의안 통과에도 기여했다.
장면 박사는 또 콜럼버스 기사단 최고위원회가 전쟁으로 고통받는 한국 민간인들을 돕는 재정 지원에도 큰 역할을 했다. 장면 박사는 당시 지원 수락 연설을 통해 “고통받는 한국 국민들을 위해 제게 주신 훌륭한 선물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우리의 고통에 대한 아낌없는 동정과 관심은 한국인에게 변함없는 감사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의 이런 기사단 활동은 초대 주미대사로서 유엔에서 북한의 침략을 받은 남한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고, 당시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 미국·영국·프랑스·중화민국(현 대만)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콜럼버스 기사단 신경수(아우구스티노) 의장은 “장면 박사와 한국전쟁의 역사 속에서 울림을 준 콜럼버스 기사단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2007년 용산 미군기지에서 설립된 ‘제14223 존 H. 캐싱 주교(Bishop John J. Kaising) 평의회’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12개의 한미 평의회와 550명이 넘는 기사들이 그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밝혔다.
콜럼버스 기사단은 1882년 미국에서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큰 신심 봉사단체로 220여만 명의 회원을 자랑하며, 자선·일치·형제애·애국심을 원칙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는 2014년 7월 군종교구 서상범(현 군종교구장) 신부를 지도 사제로 창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