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병원 병동 당직을 서고 있습니다. 병동에는 120명의 환자가 입원해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올해 8월까지는 수련병원을 마친 전공의들을 채용해 당직을 맡겼지만, 그들이 병원으로 복귀하면서 다시 임상과장과 응급의학과장이 돌아가며 일주일에 한 번씩 당직을 서고 있습니다. 낮 근무 외에 추가 당직까지 감당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공공병원은 늘 의료 인력이 부족합니다. 최근에는 개업가로 인력이 몰리면서 채용은 더욱 어렵습니다. 평일 근무에 더해 당직을 서고도, 다음 날 평일에는 다시 업무에 복귀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는 병동 당직 전화기가 SNS 앱의 업데이트 요구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응급실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병동 당직을 선다는 것이 점점 버겁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올해는 지자체 예산까지 줄어들어 공공의료 지원금이 대폭 삭감되었고, 진료 수입을 늘리라는 압박이 어깨를 짓누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무너졌던 일상 병원 진료가 상당 부분 회복되었으나 상승한 인건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지속적인 지차제의 지원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공공병원의 장점은 누구도 가리지 않고 필요한 환자에게 최선의 진료를 제공하는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비능률적이고 소모적인 병원’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서운함이 쌓입니다.
메르스, 코로나 확산 시절을 떠올려봅니다. 우리 병원은 누구보다 먼저 환자를 받아들였고, 평소에는 청소나 배달 같은 본래 업무 외의 일도 직원들이 함께 도맡아내며 공동체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팬데믹 이후 함께 회복을 위해 애쓰고 있지만, 공공의료의 적자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공공의료의 진정한 의미는 점점 잊혀져 가는 듯합니다.
대학생 시절, 농촌 봉사 활동이나 빈민촌 주말 진료에 참여하며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이 있습니다. “의사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돈 없는 사람도 제대로 치료받게 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병원(공공병원)에서 일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일까!” 그때의 설렘과 고민이 지금 다시 떠오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여 스스로 인간 예수가 되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사랑의 완성입니다. 지금 나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다가갈 수 있는 엄청난 탈렌트를 주심에 감사하기보다는 탈렌트를 비싸게 팔아먹을 욕심과 기득권만 남아있지 않은지 뒤돌아봅니다.
글 _ 김덕원 파스칼 바일론(경기도의료원 수원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