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칼럼] 순례, 어제와 오늘

(가톨릭신문)

최근 ‘헤럴드 트리뷴’은 서유럽의 순례자 수가 놀라울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선진국에서 종교가 쇠퇴하고 있다는 가정과 증거를 뒤엎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성지인 루르드(Lourdes)는 1858년 순례가 시작된 이래 가장 많은 550만 명의 방문객을 기록했다. 다른 성지들도 비슷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많은 인파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종교적 부흥의 시작일까? 아니면 교통편의 개선 덕분일까? 사목자와 사회학자들은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 신부는 “아마도 사람들은 단조로운 신심 생활에 조금은 지루함을 느끼고 더 강렬하고, 더 축제 같고, 더 특별한 무엇인가를 원하고 있다”면서 “아마도 현대 종교의 형태가 사람들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전했다.


몇 해 전, 필자가 몸담고 있던 대학은 인도 뭄바이의 한 성모 성지에서 작은 조사를 실시했다. 그곳에서는 매주 수요일에 수많은 신자가 모여 기도회를 열었는데, 그중에는 신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도 많았다.


“왜 성모 마리아께 기도하시나요?” 우리는 수많은 힌두교 신자에게 물었다. “여러분에게도 락슈미(Lakshmi), 두르가(Durga), 칼리(Kali) 같은 여신들이 있지 않나요? 그분들이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즉각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 여신들 가운데 아기를 품에 안은 이는 없어요. 그분들은 어머니들이 필요한 것, 어머니들의 불안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이것을 알지요.”


성지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이 수천 장의 기도 지향을 기도함과 단지 속에 넣고 있다. 그 지향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다. 더 나은 건강을 위해, 속을 썩이는 자녀를 위해, 일자리와 결혼을 위해, 이혼의 위로를 위해. 너무도 익숙한 기도 제목들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뒤, 성지(Holy Land) 순례는 크게 꽃피었다. 성지는 모든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첫 번째 성스러운 장소가 되었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예루살렘을 직접 방문해 그리스도의 생애, 수난, 부활과 관련된 장소들을 확인했다. 


그곳에 교회들이 세워졌고, 로마 제국 전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몰려들었다. 순례는 단순한 신심 행위가 아니라 신앙의 구체적 역사와 연결되는 수단이기도 했다.


중세에는 순례가 가장 대중적인 그리스도교 신심 형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영국의 캔터베리 그리고 로마의 교회들은 수백만 명의 순례자를 끌어들였다.


순례는 종종 참회의 행위이자 치유를 구하거나 서원을 이행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회심을 경험한 후, 처음에는 성지에 머물며 순례자들을 섬기고 싶어 했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는 순례가 종교적 행위이면서 동시에 매우 인간적인 사건이었음을 보여준다. 다양한 계급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영적 여정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순례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을 드러낸다. 회개와 죄와 옛 습관을 버림, 성지와 성물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 만남, 동료 신자들과 함께 여행하며 ‘순례 교회’를 형성하는 통교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순례는 단순한 지리학이 아니라 인류학이자 신학이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길 위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순례를 떠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거나, 루르드나 벨랑카니 같은 성모 성지를 찾거나, 수도원에서 피정을 하기도 한다.


동시에, 순례를 은유로 바라보려는 성찰도 새롭게 이어지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 헌장(Lumen Gentium)」은 교회를 “하느님의 순례하는 백성”이라 표현하면서 겸손과 불완전함, 희망을 강조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노달리타스를 말하면서 자주 순례의 은유를 사용했다. 참여, 사명, 식별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고대에서부터 시작된 순례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현대인들을 위해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순례는 그리스도교 역사와 성경, 신학을 관통하는 ‘금실(Golden Thread)’처럼 이어져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함께 걷는 것이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동반으로 여정을 이어가는 것이다.


실제 순례는 마음속 내적 순례를 가시화한다.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안식하기까지 ‘나그네(Viatores)’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글 _ 미론 페레이라 신부
예수회 사제로 평생을 기자 양성 등 언론 활동에 힘써 왔다. 인도 하비에르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아시아가톨릭뉴스(UCAN), 라 크루아(La Croix) 등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