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영화보다 더 극적인 사람들이 있다. 곤살로 게레로(1470~1536)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1511년 8월 다리엔(파나마)에서 산토도밍고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유카탄 마야족의 포로가 되었다. 일행 중 최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그와 가톨릭 수사인 헤로니모 데 아길라르뿐이었다.
이후 두 사람의 행보는 갈렸다. 아길라르 수사는 가톨릭 신앙과 스페인 왕에 대한 충성심을 지키며 노예 생활을 감수했다. 반면 군인 출신이었던 게레로는 마야족에게 전투기술을 가르쳤으며 모시고 있던 주인을 악어의 습격에서 구출하여 자유인이 되었다. 그 후 연이은 무공을 세워 ‘나콤(대장)’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며 마야족의 공주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수년이 지난 1519년 2월, 멕시코 정복을 위해 유카탄반도 앞 한 섬에 상륙한 에르난 코르테스는 현지 원주민에게서 인근에 스페인 사람들이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는다. 코르테스는 원주민 인편으로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 구조 의사를 밝혔다. 아길라르 수사는 감격에 겨워 코르테스에게 합류했다. 그리고 8년간 익힌 마야어를 바탕으로 원정대의 통역 역할을 하며 정복에 기여하게 된다.
반면 원주민 문화에 완벽하게 동화된 게레로는 잔류를 선택했다. 그는 함께 떠나자는 아길라르 수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거절했다. “아길라르 형제여! 나는 이미 결혼했으며 세 명의 자식이 있네. 나는 이곳에서 추장이자 대장이 되었네. 문신한 얼굴에 귀를 뚫었는데 이런 내 모습을 본다면 스페인인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할 것인가? 하느님과 함께 떠나게. 자네는 내 아이들이 얼마나 예쁜지 이미 보지 않았는가!”
가족 때문에 남기로 결심한 게레로는 마야인들에게 정복자들에 맞서는 방법을 가르쳤다. 스페인 원정대는 자신들의 전술을 꿰뚫고 있는 마야 전사들 앞에서 연이어 난관에 봉착하며 곤혹스러워했다. 끝내 게레로는 1536년 8월 13일 온두라스 울루아 강의 계곡에서 스페인인들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게레로는 죽기 직전 부하 원주민들에게 처자식을 잘 보살펴달라고 당부했다.
게레로는 이후 수 세기 동안 스페인 역사에서 ‘배교자’로 불리며 지탄받았다. 특히 가톨릭 신앙을 저버린 죄가 컸다. 그러나 게레로의 이야기를 전한 연대기의 기록은 모두가 유일한 생환자인 아길라르의 일방적인 증언에 근거한 것이다. 아길라르는 자신을 여러 유혹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지조와 왕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의인으로 미화했다. 반면 게레로에 대해서는 여색에 눈이 멀어 이교도와 가정까지 꾸린 부정적인 인물로 전했다.
그러나 멕시코 독립 이후 게레로는 멕시코인들 사이에서 식민주의·제국주의와 싸운 상징적 인물로, 그리고 ‘최초의 메스티소(스페인인과 원주민의 혼혈 인종)의 아버지’이자 ‘고귀한 귀순자’로 불리며 높이 추앙받게 된다.
필자는 가끔 곤살로 게레로가 천국에 갔을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가 신앙을 저버렸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아길라르의 버전과는 다른 이유에서였을 가능성이 크다. 배교행위가 나쁘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나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약자인 원주민을 지키려는 선한 의도와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착한 배교자’인 게레로의 영혼은 구원받을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신학적 지식이 짧은 필자의 소견이다.
글 _ 전용갑 요셉(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스페인어통번역학과 교수, 세계문학비교학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