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버려도 되는 걸까?

(가톨릭신문)

2015년 프랑스 파리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1)에서 전 세계 195개국은 지구 평균 온도 상승 폭을 산업화하기 이전(1850~1900년) 대비 2℃ 이하로 유지하고, 가능하면 1.5℃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파리협정’을 맺었다. 이 수준을 넘어서면 해수면 온도가 올라가는 속도가 빨라지고, 산호초의 70~90%가 멸종하며, 극심한 폭우, 가뭄, 홍수, 태풍 산불 등 각종 이변이 일어나 지구와 인류를 괴롭힐 것이 예측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4년 세계기상기구는 산업화 이전 대비 1.55℃가 올랐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제 인류라는 종은 지구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인가? 그래서 단순한 경고는 위기를 넘어 재앙이라고 표현된다. 이미 재앙의 시기는 다가온 것 같다. 작년에는 빗방울이 살짝 보이기만 해도 반가워 뛰쳐나온다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하루 만에 1년 치 강수량에 달하는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났다. 성경 말씀대로 사막에 물이 솟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지만, 모든 것을 마비시키는 최악의 사태였다. 

 

 

이런 위기 상황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11월 10일부터 21일까지 브라질 벨렝에서는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30)가 열렸다. 아마존을 배경으로 살아오던 남미의 8개 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의 선주민(원주민이라는 말과는 미묘한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 요즘 사용되는 단어) 대표들이 에콰도르에서 출발해 벨렝까지 3000km를, 아마존강을 따라 항해했다. ‘물의 어머니’라는 배를 타고 그 먼 거리를 횡단한 이유는 정작 가장 적게 온실가스를 배출한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는 현실에 저항하는 몸짓이었다.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 나라의 대표들, 트럼프도, 푸틴도, 시진핑도 오지 않은 회의였다는 사실이 그들의 몸짓을 더욱 결연하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현장이었다. 이 행사를 위해 보내온 레오 14세 교황의 “평화를 원한다면 모든 피조물을 보호하라”는 간곡한 당부에도, 행사 결과에서 ‘화석연료 퇴출 로드맵’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는 뒤로 미뤄졌다. 그리고 강대국과 산유국의 입김이 작용한 그저 그런 절충안을 마련하는 수준으로 마무리됐다.

 

 

기후 위기를 이야기하기 전에도 한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부터 자연보호운동이 있었다. ‘자연보호’ 헌장이 선포되고 국민적 운동으로 전국을 휩쓸었다. 쓰레기 줍기부터 시작하여 멸종위기 식물 복원, 하천 정화, 등 환경보전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운동은 그 자취를 찾기 어려워졌다. 

 

 

폐지를 모으고, 일회용품을 안 쓰겠다고 선언하고, 재활용을 생활화하자고 했고 이를 위한 ‘아나바다’ 운동도 있었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단순한 운동이었지만 국민의 호응은 대단했다. 당시 각 성당에서는 일회용 종이컵을 쓰지 말자고 스테인리스 컵을 사서 공용으로 사용하도록 비치하기도 했다. 성당 한구석에는 폐식용유를 이용해서 친환경 비누를 만들고, 공병과 폐지를 분리해서 수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제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런 풍경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아껴 쓰고 고쳐 쓰기보다는 싸고 편리한 일회용 세상이 되었다. 가정용품, 생활용품들도 고장이 나면 고치기보다는 ‘천원 가게’로 불리는 저가형 생활용품·잡화 전문 판매점에서 싼 맛에 쓰고 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일회용품은 차고 또 차는, ‘그래도 당연한 것’처럼 되었다. 기후 위기와 지구 온도 1.5℃를 이야기하기 훨씬 전에도 지켜지던 소중한 가치들이 어느 순간부터인지 내동댕이쳐졌다. ‘그렇게 버려도 되는 걸까?’ 우리의 일상에서 살리지 못한다면 세계 어떤 유력한 회의를 통해서도 이루지 못하는 창조 보전이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