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소년 유대철 베드로의 순교’, 랜턴 슬라이드, 1925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시복식에 주스타니안의 ‘79위 복자화’ 걸려
100년 전, 1925년 7월 5일 오전 10시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는 비오 11세 교황 주례로 기해(1839년)·병오(1846년)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이 거행됐다. 일본의 속국 ‘조선’이 아니라 ‘진짜 한국’을 보편 교회에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날 시복식에서 신유(1801년)·병인(1866년)박해 순교자들이 빠진 이유는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기해박해 순교자 73위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병오박해 순교자 9위의 ‘순교자 행록’(Acta Martyrum)만을 1847년 교황청 예부성성(오늘날 시성부)에 보냈기 때문이다. 이들 82위 순교자 기록은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가 라틴어로 정리했다.
10년 후인 1857년 82위 순교자에 대한 시복 건의 개시가 선언됐고, 조선대목구는 1882년부터 시복 재판을 시작해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을 정리, 번역해 1906년 교황청 예부성성에 제출했다. 예부성성은 가경자 82위 가운데 감옥에서 열병으로 죽은 것으로 판정받은 정 아가타, 한 안나, 김 바르바라를 제외한 79위의 순교 사실을 확정했다.
순교자로서 기적 심사 관면을 받은 ‘갑사의 주교 라우렌시오 앵베르와 동료 순교자들’은 앞서 말했듯이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된다. 이날 시복식에는 한국 교회 대표로 경성대목구장 뮈텔 주교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 예수성심신학교 교장 기낭 신부와 한기근(바오로) 신부, 장면(요한) 선생이 참여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장면의 동생 장발(루도비코)도 시복식에 합류했다.
시복식이 거행된 성 베드로 대성전 사도좌 제대 위에는 ‘앵베르 주교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의 복자화가 걸려 있었다. ‘영광’이란 제목의 이 복자화와 함께 성 베드로 대성전 안에는 ‘소년 순교자 유대철 베드로’<사진 1>, ‘김효임 골룸바와 동료 순교자 9위의 순교’<사진 2>,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를 묘사한 ‘세 프랑스 사제’ 복자화가 걸려 있었다. 모두 이탈리아 화가 주스타니안(Giustanian)의 작품이다.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79위 복자화’ 역시 그의 작품이다.
주스타니안의 79위 복자화는 한국 교회 순교자 성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시복식에 참여한 우석 장발 화백은 주스타니안의 복자화를 본 후 크게 감명해 평생 성화 작품에 매진하게 된다. 그는 귀국해 주교좌 종현(명동)대성당의 제대 벽화 ‘열네 사도’를 제작했고, ‘복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복자화’도 그렸다.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김효임 골룸바와 동료 순교자 9위의 순교’, 랜턴 슬라이드, 1925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베버 총아빠스, 한국 교회 순교 역사에 매료
한국 교회는 79위 시복을 기념해 1925년 7월 12일 주교좌 종현대성당에서 복자 유해 거동과 친구 행사를 거행했다. 경성부대목구장 드브레 주교와 원산대목구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가 이 행사를 집전했다. 또 그해 9월 19일부터 21일까지 3일 동안 종현대성당에서 매일 ‘조선 치명자 79위’ 미사, 복자 유해 친구, 강론, 성체 강복 순으로 시복 경축 행사가 거행됐다.
한국 교회는 또 1926년 8월, 79위 복자들 중 가장 많이 순교한 9월 20일을 ‘한국 치명 복자 79위 첨례’로 정하고 현양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7년 4월에는 주교좌 종현대성당 좌측 회랑에 대리석으로 제작한 ‘복자 제대’를 새로 설치했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때마침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이 있던 해인 1925년 5월 14일 방한해 10월 2일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그는 79위 복자 탄생이 안겨준 한국 교회의 영광과 기쁨을 이 땅에서 직접 체험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한국의 유산을 파괴하고 있는 동안 한국인들은 본받을 수 있는 새로운 인물, 이 세상의 어떤 권력도 없애 버릴 수 있는 모범을 순교자들에게 발견하게 된 것”을 직접 지켜봤다.(「분도통사」 436쪽)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 역사에 매료돼 있었다. 그는 1911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순교지를 순례하기도 했다. 그는 기해와 병오박해를 이렇게 서술했다.
“다섯 번째 박해에서 모방 신부와 그의 협력자 샤스탕 신부 그리고 앵베르 주교가 순교했다. 그들의 머리도 용산 앞 한강변의 누런 모래밭에 나뒹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는 세 분 목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강 건너편 산에다 모셨다. 그때부터 그 산을 삼성산, 즉 ‘세 성인의 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외교인들이었다.
1839년 신앙의 열정으로 피 흘린 사람이 어디 이 세 분뿐이겠는가? 1801~1802년의 영웅들이 부활한 듯했고, 로마 카타콤바 시절의 순교자들이 다시 돌아온 듯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앞다투어 고문을 당하고 망나니의 칼날을 받았다. 양갓집 규수인 전 아가타와 박 루치아는 다리가 꺾여 뼈에서 골수가 흘렀다. 포악한 망나니들은 유 베드로와 이 아나스타시아 같은 아이들에게까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괴롭혔다. 놀랍도록 숭고한 고난이 유례없는 악을 이겨냈다. 조선 교회는 수난을 통해 강해졌다.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복자 김대건 신부 성해’, 유리건판, 1925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오틸리엔 수도원에 김대건 신부 성해 안치
1839년 대박해의 끔찍한 후폭풍은 지방에서 소규모 박해들을 양산했다. 그 와중에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 안드레아 신부가 검거되었고 1846년 참수되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21~122쪽)
베버 총아빠스는 용산 신학교 언덕에서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새남터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내 시선은 순교자의 피로 물든 그 장소를 찾고 있었다. 편협한 장사꾼 기질과 국가적 타산으로 수천 년 동안 폐쇄되어 있는 이 ‘죽은 백성’에게, 이리도 숭고한 이상을 추구하는 삶과 영웅적인 힘이 충만하다는 것을 위대한 순교자들은 피로써 증거했다. 이런 힘이, 아니 이런 힘만이 죽어 가는 민족을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 힘의 원천이 그리스도교다. 자신의 피와 생명을 기꺼이 바치는 영웅이 그리도 많았는데, 이 백성이 ‘죽은 백성’일 리 없다. 다만 생기 넘치는 발전 도상에서 어두운 감옥에 갇히고, 폭군의 압제에 시달리고, 양반들에게 착취당했을 따름이다. 감금과 고립과 죽음과 고문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이 백성은 그리스도교의 자유로운 하늘 아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기쁨에 충만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23~124쪽)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대성당 중앙 제대에는 김대건 성인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사진 3> 성인의 갈비뼈 일부가 성해함에 안치돼 ‘STERNUM B. ANDR. KIM’ ‘Primi SACER. COREANI MARTYRIS’(복자 김 안드레아, 한국인 첫 사제 순교자)가 자수(刺繡)돼 있는 성해보에 싸여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갔다. 이는 1925년 시복을 앞두고 뮈텔 주교가 경성·대구·원산대목구에 분배한 김대건 신부의 성해다. 아마도 1925년 10월 독일로 떠날 때 베버 총아빠스가 들고가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