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가난도 고독도 그 어떤 눈길도’(피천득 시(詩) <너는 이제> 중)
턱 위에 하얀색 수염 두 가닥이 처음으로 올라왔다. 허락 없이 세월은 잘도 간다. 나는 지난번 칼럼에서 22년 전 뵈었던 금아 피천득 프란치스코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소개했었다. 질문은 그 사람의 의도를 드러낸다. 왜 그때 나는 ‘성직과 예술을 병행할 수 있을지’에 관해 물었던가. 여러 대화 속에 선생님은 ‘나 자신을 절대 팔아서도 버려서도 안 된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60여 년을 보살피던 딸 이름의 인형 ‘난영이’까지 보여주시면서.
선생님은 인기와 죽음에 대한 말씀도 하셨다. “인기라는 게 참 우스운 거예요. 정당한 눈으로 보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결국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해봐요. 누구나 사람은 한 번 가는 건데, 돈 많은 사람들도 그것 때문에 갖은 죄를 다 짓고 못 할 짓을 다 하고 그럽니다. 죽음 앞에서 다 놓고 갈 뿐인데 말이죠. 죽음은 아직 미지입니다. 그래서 천국이라는 게 있다고 믿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증명할 수는 없는데, 천국이 있다고 믿는다 해서 손해 볼 것은 없으니까요.”
녹음하던 당시 나는 안식처를 찾고 있었다. 오랜 수고와 어두움을 벗어나 쉴 수 있는 자리. 타인의 시선으로 대화 녹음본을 듣다가, ‘하고 싶은 말을 망설이는 나’를 기억해 냈다. 질문 속에 가려진 이야기들. 선생님은 대화를 이끄시면서 내 마음을 서서히 열고 계셨다. 질문자와 답변자가 바뀌는 시점. 그러나 나는 입안에서 맴돌던 진심을 말하지 못했다.
녹음이 중반을 넘어서자, 선생님께 “글을 쓰시다가 절필하면 답답하지 않으시냐?”고 여쭤보았다.
“누구나 글쓰기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계는 양심적으로 자신이 판단해야 하지요. 대개 작업을 중단하기가 그래서 참 어려워요. 쓰던 글을 안 쓰면 세상에서 망각되는 걸로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자기가 쓴 작품을 더 이상 따라가지도 못하고, 기존 것만도 못한 것을 되풀이해서 씁니다. 서양에는 그런 말이 있어요.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술을 먹든지 아니면 침묵을 지키든지.’ 저는 술을 못 먹으니까 안 쓴다고 한 거고요. 글을 안 쓴 지가 오래됐어요. 그래도 소위 문운은 있어서 그런지 책이 팔리지만, 그 책들도 30년 전에 쓴 겁니다. 가끔 시 몇 편도 썼지만, 안 쓴 지가 10년이 되고요.”
그동안 문학과 인생에 관해 묻는 이들에게 이렇게 답을 주셨을 것이다. 금아 선생님의 절필은 작가의 근본적인 성찰에서 나온 결과였다. 한계의 선과 나를 포기하는 용기. 미사 때마다 강론해야 할 때 나는 기도보다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글쓰기로 대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강론하는 것도 어렵지만 말씀을 듣는 이들은 또 어땠을까.
그저 신앙의 신비와 착한 교우들 덕분에 살아가는 인생. 나도 이참에 선생님 흉내를 내며 강론 절언이라도 해야 하나 싶어 쓴웃음이 났다. 이런 답을 들으시면 특유의 ‘음~’하고 입소리를 더 크게 내시며 웃으셨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삶의 스승이 되는 분들께 자주 ‘삶이 고단한 이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해달라고 청을 드린다. 그때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저는 일제강점기를 겪었어요. 지금은 비가 오고 늘 비가 올 거 같지만 그렇지는 않아요. 이 세상에는 좋은 게 더 많거든요. 좋은 사람이 더 많고 암만 나쁜 사람도 종일 나쁜 생각만 가지지는 않아요. 앞으로 가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이 계시니까. 좋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이렇게 우주가 질서 있게 돌아가는 걸 보면 이게 그냥 우연은 아니지요. 지금 당장 고통이 있더라도, 하느님을 믿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금아 선생님이 계실 때보다 모습을 달리하면서 아픔이 많아졌다. 타인에 대한 연민의 마음은 커질 수 있는데, 다들 자신만 돌보느라 그 자비로운 마음에 소홀해지고, 점점 더 하느님보다 세상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산다. 나는 나침반이 알려주는 인생의 방향보다, 황금으로 된 나침반 바늘에만 관심을 두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난 그때 사제품을 앞두고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여쭤봤다.
“저는 그렇습니다. 사람이 먹고 입고 해야 하지만 건강하면 됐지 싶어요. 세상에 그렇게 욕심을 내면 벌써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간 20년이 넘는 세월을 어떤 사제로 살아왔나 돌아보았다. ‘가난’이 목적이 아닌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싶었는데, 살아온 만큼 똥고집에 가까운 자기 확신만 쥐고 살았던 게 아닌가 해서 마음이 씁쓸했다. 녹음본이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부제님이 저에게 사람에 대한 욕심과 아름다운 이들에 대한 미련이 있다고 했지요. 그건 ‘정직한 마음’입니다.” 여기까지 왔을 때 22년 전에 ‘하고 싶었던 질문’이 드디어 떠올랐다. 천국에서 뵙게 되는 날 선생님께 다시 여쭤볼 수 있을까.
그때 금아선생님이 ‘예술과 성직’은 병행할 수 없으니, 둘 중에 하나만 골라야 한다고 하셨다면 어땠을까. 답이 없는 문제로 불안했던 그 시기. 인생의 길을 결정하기에 스물여덟은 미숙했다.
나는 첫 질문을 이렇게 했어야 했다. 좀 더 솔직하게 “예술만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요?”라든가 아니면 좀 더 절실하게, “선생님, 제가 다른 길을 선택하더라도 하느님은 저를 사랑하실까요?” 아니, 더 단순하게, “이 길이 제게 맞나요?”였을지 모른다. 그러면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내가 아는 선생님은 아마도 그 답을 ‘신비’로 남겨둔 채, 침묵하셨을 것이다. 그건 하느님의 몫일 테니까.
‘아빠는 운동장에서 종 칠 때를 기다렸다.’
이 문장은 선생님의 시 ‘기다림’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나는 이제 어렴풋이 알 것만 같다. 인생의 고단한 짐을 내려놓는 마지막 그날, 자녀의 하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느님은 나를 반겨주시리라. 그리고 조용히 물음의 답을 해 주실 것이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