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성은 자기 주체성 자각하게 하는 핵심 계기
(가톨릭평화신문)
우리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타자(他者)’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타자는 그 이상의 철학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타자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으며, 타자는 무엇보다 자기의식과 자기 인식의 주요 계기가 된다. 타자의 개념이 철학적으로 중요한 주제가 된 것은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이 생활세계를 자기와 타자가 상호주관적으로 공유하는 ‘의미 지향성의 세계’로 제시한 이후부터다.
부버(Martin Buber, 1878~1965)에 의하면 인간은 세계와 관계 맺음에 있어서 ‘나-너(Ich-Du)’와 ‘나-그(Ich-Es)’의 두 가지 태도를 보인다. 전자가 타자를 고유한 인격적 존재로 대하는 태도라면, 후자는 타자를 사물화하고 객체화함으로써 도구적으로 대하는 태도다. 인간은 타자와 관계 맺음에 있어 나와 너의 인격적 존재로 서로 만날 때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뿐 아니라 상대를 통해 변화하며 자기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타자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철학자로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와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가 있다. 사르트르가 타자를 나와 대립하는 갈등적 존재로 본다면, 레비나스는 타자를 절대적으로 환대해야 할 초월적 대상으로 본다.
사실 사르트르의 주장처럼 타자는 우선 나에게 불편하고 거북한 시선으로 다가온다. 타자의 시선은 나를 대상화하고 객체화함으로써 나의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타인은 나를 보고 관찰하는 주체로서 나는 그 시선 속에서 관찰의 대상이 되며, 이는 근본적으로 수치심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한 타인의 시선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타인의 세계 속의 한 객체임을 자각하며,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주체가 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타자는 분명 나를 부자유스럽게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를 이해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다. 우리는 이런 타자와의 갈등과 고통 속에서 타자와 대결하는 가운데 상호 주체적 존재로서 나의 주체성을 자각한다.
이와 달리 레비나스는 불편한 ‘타자의 시선’이 아닌, 윤리적 호소를 하는 ‘타자의 얼굴’에 주목한다. 타자는 불편한 시선으로 갈등 관계를 유발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적극적으로 환대해야 할 존재다. 레비나스는 무엇보다 나의 이해를 절대적으로 넘어서 있는 타자의 초월성과 불가해성을 강조한다. 타자는 지식이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는 무한한 존재요,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서 그 어떤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할 절대적 존재다.
타자의 얼굴은 단순한 신체 부위이기보다는 오히려 타자가 나에게 고유하게 다가오는 윤리적 명령의 현현 방식을 의미한다. 즉 그를 환대하고 긍정하며, 그 앞에서 헌신하도록 명령하는 ‘윤리적 부름’이다. 이렇게 타자가 절대적으로 윤리적 책임을 명령하고 호소하기에 우리는 타자 앞에서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처럼 타자는 나와 전혀 ‘다름’으로 내 앞에 존재하면서 나를 주체적 존재로 초대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타자의 다름을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혹은 오로지 대립과 투쟁의 대상으로만 삼는다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은 요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타자의 타자성은 바로 인간이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 주체성을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계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