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가톨릭평화신문)
어느새 우리는 실제 삶보다 SNS에서 잘 꾸민 모습으로 더 주목받는다. ‘보이는 삶’ 속에서 스스로 ‘보는 법’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OSV

출근길 붐비는 전철 안, 겨우 몸 하나 끼어들 정도 틈에서도 거울을 꺼내 화장하는 사람을 본다. 작은 파우치에서 꺼낸 화장품으로 눈앞에서 미묘하지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는 이렇게 누군가의 시선 속에 비치는 ‘나’를 만든다. 그리고 일터라는 무대에 설 ‘보이는 나’를 점검한다. 사실 내가 나를 보는 시간보다 남이 나를 보는 시간이 훨씬 길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도 모른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보는 행위는 존재에 대한 접근”이라 했다. 보는 것은 관계의 시작이며 이해의 출발이다. 여기서 ‘보는 나’란 세상을 능동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하는 주체적 자아를, ‘보이는 나’란 타인 평가의 시선에 의해 규정되는 수동적 자아를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보는 나’보다 ‘보이는 나’에 더 매달린다. 보이는 나에 갇혀 타자의 시선만 좇다가 정작 보는 나를 잃는다. 이렇게 주체적 인식능력을 상실한 채 표면만을 좇게 되고, 사람을 외모나 조건, 숫자로만 평가하며 본질을 놓치게 된다.

요즘 혹사당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우리의 ‘눈’이다. 스마트폰을 오래 볼수록 시력은 나빠지고, 먼 풍경을 바라볼수록 눈은 건강해진다. 시선을 가까이에만 고정하면 시야는 좁아지고, 멀리 둘수록 마음이 넓어진다. 눈 건강의 법칙은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데 우리는 늘 가까이에 확대된 자극 속에서 산다. 강렬한 광고판, 화면 속 이미지들이 시선을 붙잡는 세상, ‘보이는 것’이 넘쳐나고 ‘보여야만’ 살아남는 시대다. 우리는 과연 정말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보이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이런 환경에서 우리 시선은 점점 근시안적으로 흐려져 간다.

SNS에서 실제 삶보다 잘 꾸민 순간이 더 주목받는다. 필터로 다듬어진 얼굴, 행복한 순간만 모아 올린 피드 속에서 ‘보이는 삶’이 실제 ‘사는 삶’을 앞서는 시대다. 우리는 이제 ‘보는 눈’보다 ‘보이는 프레임’에 더 익숙해졌다. 사진을 올릴 때도 내 만족보다 타인의 반응을 먼저 생각한다. ‘좋아요’ 숫자가 자존감을 좌우하고, 끊임없는 비교 속에 스스로를 축소시킨다. 보이는 나를 관리하느라 정작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능력을 점차 잃어간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보는 법’마저 잊어버리고 만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자아를 ‘Me’와 ‘I’로 구분했다. ‘Me’는 타인의 시선이 만든 자아이고, ‘I’는 주체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아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Me’에 투자하고 ‘I’를 소홀히 한다. 보는 나를 잃으면, 세상이 만든 이미지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진정한 보는 힘은 대상을 대하는 마음에서 온다. 감각을 넘어 외형 너머의 의미를 읽는 능력이다. 속도와 효율, 이미지와 숫자에 묶이면 ‘보이는 대로’만 보게 된다. 그렇게 보이는 대로 보며, 보이는 나로 살아간다. 하지만 보이는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세상 기준에 휘둘려 스스로를 부족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는 나’는 다르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곧 나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서 얼굴을 본다. 주름과 검버섯, 나이 듦의 흔적들이 보인다. 그 안에는 사랑과 미움, 성공과 실패, 그리고 성숙과 지혜가 담겨 있다. 진정한 자유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세상이 무엇을 요구하든, 나를 진심으로 바라보는 눈을 가진다면 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존재는 빛난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는 ‘나’, 나의 삶 전체를 만나는 ‘나’. 그래서 소중한 나를 본다.

세상이 규정한 ‘보이는 나’에서 벗어나, 내가 선택한 ‘보는 나’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자존의 시작이며, 관계의 회복이고, 자유로 가는 길 아닐까?

“진짜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진짜 아름다움은 마음으로 보아야 해.”



<영성이 묻는 안부>

“얼굴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얼굴이 잘났으면 앞줄에 섰을 텐데, 어깨라도 폈을 텐데.”

옛날 한 코미디언이 한 말인데, 마치 “왜 내가 못생겼다고 죄송해야 하지?”하는 묘한 저항이 느껴집니다. 웃음 뒤에 남는 씁쓸함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생각 때문일 겁니다. ‘남들 눈에 괜찮은 나로 보여야 한다’는 강박과, 그것을 외모나 학벌·재산 같은 조건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세상의 요구 말이죠. 그래서 ‘보는 나’로 산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 삼지만, 진짜 가치는 ‘보는 힘’에서 나옵니다. 이 힘은 겉모습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는 눈에서 옵니다. 누구나 ‘보이는 대로’는 볼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려면 영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눈으로 보고 만져야만 믿는 사람은 결국 ‘보이는 것’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 깊은 곳에서 전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성을 만날 기회가 줄어듭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이지 않던 게 보이기 시작할 때가 있습니다. 그건 보이는 세상을 넘어 보이지 않는 신비한 세계로 한 걸음 더 들어서는 경이로운 순간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