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은 삼위일체의 수줍은(shy) 위격이다.”
신학자 프레더릭 데일 브루너와 윌리엄 호든의 정의는 파격적이다.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영광을 받으시는 성령께 ‘수줍음’이라는 수식어는 분명 낯설다. 그러나 이 표현은 성령께서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신 채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교회 내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작동하게 하는 방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성령은 신앙 속에서 늘 현존하지만, 동시에 가장 붙잡기 어려운 분이다. 성부는 창조주로, 성자께서는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다. 반면 성령은 숨결, 바람, 물, 불, 구름과 빛, 손가락, 비둘기 같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브 콩가르 추기경은 “성령은 모습이 없다”고 지적하며, 그분은 형태로 포착되기보다 ‘선물(Donum)’처럼 선사되는 분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성령에 대한 노래는 종종 청원으로 시작된다. 성령 찬미가 〈오소서, 창조주님(Veni, Creator Spiritus)〉 역시 그렇다. ‘오소서 창조주님, 성령께서 찾아오사, 창조하신 마음속에, 천상 은총 채우소서’라는 가사는 성령을 정의하기에 앞서 먼저 그분을 부른다.
니콜로 욤멜리(Niccol? Jommelli, 1714~1774)의 〈오소서, 창조주님〉는 바로 이 부름을 전아한 선율로 펼쳐 보이는 작품이다. 욤멜리는 18세기 이탈리아의 저명한 오페라 작곡가이자 나폴리악파의 주요 인물로,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소속의 카펠라 줄리아에서 활동하며 뛰어난 성음악도 다수 남겼다.
곡은 소프라노 독창과 4성부 합창으로 구성된다. 오페라 아리아를 연상시키는 독창의 유려함과, 그것을 받아 확장하는 합창의 응답이 작품의 주요 특징을 이룬다. 마치 개인과 교회의 목소리가 서로를 비추고 대답하는 듯한 구조는 성령의 신비를 음악 형식 안에서 드러낸다. 성령은 개인의 마음 깊은 곳에 오시지만, 그 은사를 개개인 안에 가두지 않고 교회의 일치, 공동체의 찬미로 확장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찬미가는 성령을 여러 호칭으로 부른다. 그중 ‘보호자(Paraclitus)’는 본래 ‘곁으로 불려 온 분’이라는 뜻을 지니며, 라틴어 ‘advocatus’, 즉 변호자이자 협조자의 의미를 함께 품는다.
노래는 이어 성령을 ‘사랑의 샘(fons vivus)’, ‘불(ignis)’, ‘사랑(c?ritas)’, ‘축성기름(?nctio)’으로 부르는데, 이는 성령의 활동을 놀라울 만큼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이 수사들은 ‘일곱 은혜 베푸시고’와 이어지며 세례, 견진, 성체, 성품과 같은 교회의 주된 성사 안에서 하느님 은총을 중개하는 강력한 성령의 작용을 형상화한다.
마지막 ‘아멘’ 부분 역시 주목할 만하다. 악상 지시어는 ‘알레그로 콘 스피리토(Allegro con spirito)’인데, 물론 여기서 ‘spirito’를 성령으로 읽는 것은 음악 용어를 지나치게 신학적으로 환원하는 일이다. 그러나 성령 찬미가의 마지막 부분이 ‘활력 있게(con spirito)’라는 지시어로 전개된다는 사실은 지나치기 어렵다. 앞선 악장들이 성령을 부르고 그 호칭들을 묵상한다면, 아멘은 성령께서 인간과 교회를 역동적으로 움직이시는 힘을 공동체가 함께 예찬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5월 24일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듣는 욤멜리의 〈오소서 창조주님〉은 그래서 남다른 울림을 준다. 여기서 ‘오소서’라는 간절한 청원은 ‘아멘’이라는 신앙 고백으로 완성된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살아 계신 말씀인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신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87항) 그러나 그분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흩어진 목소리는 교회와 공동체의 찬미가 된다. 성령은 드러나지 않음으로 은폐되는 분이 아니다. 드러나지 않음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