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칼럼] 소통을 위해선 청중을 배려해야

(가톨릭신문)

일본에서 본당 사목을 하던 때, 당시 교황은 때때로 회칙을 발표하곤 했다. 일본어 번역본이 나오면 지구 안의 본당들은 곧바로 공부 모임을 시작했다. 더 많은 본당 신자들이 교황의 가르침을 익히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그 지구의 본당 사목자들에게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교황의 최신 성찰을 자신들이 돌보는 신자들에게 전하고, 본당과 지구가 성찰하고 실천할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본당이나 교구들에서 필자가 사목하던 지구에서 했던 일을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회칙은 그저 발표하기 위해 발표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고, 하느님 백성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경우는 드물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예외일 수 있다. 읽기 쉬운 문체와 환경 위기에 대한 폭넓은 관심이 여러 곳에서 관심과 응답을 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든 곳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미국 주교단은 전체적으로 「찬미받으소서」를 외면한 듯 보였고, 이 회칙이 신앙생활에 지니는 의미를 탐구하는 일은 관심 있는 기관과 단체, 개인들에게 맡겨졌다.


레오 14세 교황은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다룬 자신의 첫 회칙 「고귀한 인류」를 발표했다. 이 회칙은 책 한 권 분량의 긴 글이며, 읽기에 쉽지 않다. 교황의 문체, 혹은 집필 협력자들의 문체는 지적이고 거의 학문적이다. 주제는 중요하며, 교황은 그 쟁점들을 깊고 넓게 다룬다. 좋은 책이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책이다.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를 다룬 앞의 두 장은 그 자체로 독립된 교재가 될 수 있고, 어쩌면 그렇게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교황은 용어 사용에서도 상당한 변화를 보였다. 더 이상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교리’로 제시했다.


하지만 이 회칙이 우리가 일본의 본당들에서 시도했던 것과 같은 성찰 모임에 적합할지 의문이 든다.


모든 소통에는 세 가지 핵심 요소가 있다.


첫째는 메시지 자체다. 메시지는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한 참되어야 하고, 표현할 수 있는 한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또한 사람들이 그것을 전하고, 만나고, 이해하는 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반응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


둘째 핵심 요소는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다. 글을 쓰는 사람, 말하는 사람, 배우, 예술가, 무용가, 음악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메시지가 자신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전달자는 그 메시지를 이해해야 하고, 그것을 전하려는 방식에 능숙해야 하며, 역량과 확신, 충실함을 갖고 전해야 한다.


셋째, 그리고 여러 면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청중이다. 소통이라는 행위 전체는 허공에 대고 메시지를 선포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전달자의 자아를 부풀리기 위한 것이어서도 안 된다.


소통은 청중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따라서 소통의 핵심 요소는 그 소통이 향하는 청중이다. 소통은 청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청중의 관심, 능력, 개인적·물질적 자원이 소통 방식의 형태를 결정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황청을 비롯한 교회 기구들의 많은 소통 시도, 그리고 어쩌면 무엇보다 많은 강론이 실패한다.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고귀한 인류」 제목 아래에는 ‘멀티미디어’라고 적힌 버튼이 있다.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세상과 관계 맺고, 심지어 서로와도 관계 맺는 시대에, 이 버튼을 보면 누구나 교황청이 자신의 메시지를 ‘사용자 친화적’ 형식으로 제시하려는 의지를 보인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그 버튼을 누르면 교황이 회칙에 서명하는 10초짜리 무음 영상이 나온다. 사실 완전한 무음도 아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폴더를 닫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대 기술이 제공하거나 위협하는 것을 사용하고, 남용하고, 피하고, 찬양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가 거의 200쪽에 이르는 책의 형태로만 제공되고 있는 셈이다.


교황청이 반드시 회칙의 메시지를 만화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인공지능 세계가 지닌 기회와 위험에 대해 어떻게든 말하려 한다면, 그 선포를 구텐베르크의 세계관으로만 제한하는 것은 이 메시지가 필요한 청중에게 다가가려는 절박한 의지를 보여 주지 못한다.


어쩌면 교황청의 어느 부서가 인공지능을 활용해, 이 회칙을 듣고 싶어 하고 또 들을 필요가 있는 청중을 위해 다시 포장하고 다시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글_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 외방 전교회 사제로서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주교회의가 발행하는 주간 가톨릭신문 편집주간을 지내기도 했다. 현재는 아시아가톨릭뉴스(UCAN) 발행인으로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