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위대한 개츠비」: 물질주의의 허상

(가톨릭신문)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대 미국은 유럽과 달리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며 번영과 안정을 누렸다. 그러나 금주법, 방황하는 젊은 세대, 광란의 20년대, 재즈시대라는 특징들이 암시하듯 불확실성과 혼란, 불만과 허무함 등이 동시에 공존하는 시기였다. 1925년 출판된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당시 아메리칸드림과 그 이면의 모순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 소설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개츠비는 상류층 출신의 데이지와 사랑에 빠졌지만, 신분과 부의 차이 때문에 헤어져야 했다. 나중에 막대한 부를 축적해서 돌아온 주인공은 이미 결혼해 버린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아메리칸드림이 제시하는 물질적 가치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교회도 성경과 다양한 교회 문헌을 통해서 물질주의에 대한 가르침을 꾸준히 제시한다. 구약시대 아모스, 이사야, 미카 예언자는 사치스럽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을 반복적으로 비판한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부를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신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문헌과 강론에서 현대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 대한 심각한 폐해에 대해서 자주 언급한다. 물질 자체가 악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인간 태도의 문제이다.


데이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개츠비는 자신이 그녀와 같은 계층의 사람이며 그녀를 경제적으로 충분히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꾸며진 자아의 경험은 공허함 뿐이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달콤하였다. 그러나 헤어질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부유한 집과 부유하고 충만한 삶 속으로 사라졌고, 개츠비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진실한 자신이 아닌, 꾸며진 자신이 한 경험은 아침 이슬처럼 해가 떠오르면 사라져 버린다.


동시에 가면 쓴 자기 모습이 언제 드러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의 현재는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빈털터리 청년이고, 군복이라는 보이지 않는 가림막은 언제 벗겨질지 몰랐다.” 육군 장교로서 입고 있는 군복이 감추고 있는 가난을 그녀가 발견할까 두려워한다. 꾸며진 자아는 결코 안정감을 줄 수 없다.


사랑 얻으려 재물에 집착했지만…자신의 정체성 잃어버린 개츠비


잠깐의 욕망 채우는 물질적 성공…진정한 삶의 행복 이룰 수 없어


결국 데이지와의 사랑에서 개츠비는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나중에 부자가 된 주인공은 그녀의 남편 톰에게 “당신과 결혼한 건 오직 내가 가난하고 기다리기 힘들어서였어”라고 소리친다. 자신을 버리고 같은 상류층에 속한 톰을 선택한 그녀의 판단은 남성으로서 개츠비의 존재 가치를 가난과 연결한 것이다. 그녀의 결정으로 인해서 그는 가난한 자신은 가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다. 주인공의 자존감은 전적으로 돈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된다.


마침내 막대한 부를 이루고 돌아온 개츠비는 잃어버린 자존감과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집중한다. 그러나 부자가 되었어도, 자존감을 내적 가치나 도덕적 온전성에 두지 않고, 물질주의에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정하고 취약한 자아를 형성한다. 그는 데이지와 다른 사람들의 존중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부를 과시해야 한다. 고급스러운 저택을 자랑하거나, 화려한 파티를 제공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인정받아야 한다. 자존감은 끊임없는 자랑에 의존하기 때문에, 자랑이 멈춘 순간 자존감도 멈추어 버리는 약함이 있다.


심지어 주인공은 “사랑하는 데이지의 눈이 보이는 반응에 따라 자기 집의 모든 것을 재평가한다.” 즉, 자신이 소유한 것들에 대해서 데이지가 감동을 받으면 의미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비싸고 화려한 것이라도 의미가 없다. 주인공의 자존감은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그녀의 반응에 따라 결정되어 버린다.


라캉의 모방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여 자신의 욕망으로 만든다. 부에 대한 개츠비의 욕망은 바로 데이지의 욕망을 모방한 것이다. 자신의 부에 대해서 데이지가 만족할 때, 자신도 만족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느끼는 그 만족은 데이지의 만족인 것이다. 욕망은 개츠비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데이지로부터 인정받을 때 가능하다. 따라서 데이지의 욕망을 모방한 개츠비의 욕망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채울 수가 없다. 사람들에게 받은 칭찬은 잠깐 지나가는 소나기이지, 근본적인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대인들이 자존감과 행복을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서 찾으려는 태도에 대해서 비판한다. 「찬미받으소서」에서 그는 “마음이 공허할수록, 사람들은 구매하고 소유하고 소비할 대상을 더욱 필요로 합니다”라고 언급한다.(204항) 소비주의는 더 많이 소유하면 더 행복하고 더 단단한 내가 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물질적인 것들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고 중요하지만,” 결코 “삶에 충만함을 주지 못한다.”(2022년 9월 18일 삼종기도 훈화) 루카복음 12장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저장된 재물이 안정되고 지속적인 미래를 보장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물질적 성공이 자존감과 동일시될 때, 도덕적 양심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소비 만능주의가 초래하는 “가장 큰 위험은, 하찮은 쾌락을 열병처럼 추구하는 태도, 그리고 무뎌진 양심이다.”(「복음의 기쁨」 2항) 물질과 소비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버릴 때,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안에서 경험될 수 있는 의미와 가치는 사라져 버린다.


경제적 성공만이 자신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주인공은 약국에서의 불법 주류 사업을 통하여 부를 획득하였다. 또한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며 자신의 과거까지 위조한다. 데이지는 뺑소니로 남편의 애인을 죽였지만, 자신이 “저지른 엉망진창을 개츠비가 치우도록 만들고,” 자신과 남편은 “자기들의 돈과 그 거대한 무책임 속으로 도망쳐 들어간다.”


결국 데이지는 개츠비라는 고유한 한 인간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소유한 물질적 화려함에 이끌렸다. 그가 자신의 셔츠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자 그녀는 울먹이며 말한다. “정말 아름다운 셔츠들이에요. 슬퍼져요, 이렇게,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을 본 적이 없어서.”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찼다.” 주인공의 파티에 왔던 수많은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그의 장례식에는 “경찰과 사진사들 말고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인간의 효용 가치가 떨어지면 버려지는 물건처럼, 더 이상 화려한 파티를 열어줄 수 없는 개츠비는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찬미받으소서」 중 ‘버리는 문화’(20~22항) 참조)


최근까지도 많은 사람이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만 가면 물질적 성공을 이루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바로 눈앞에 있다. 그러나 지금 세계에서 자행되는 폭력들을 보면서, 1920년대 아메리칸드림이 경제적 풍요로움 뿐만 아니라, 왜 혼란과 불확실성, 불만과 허무함을 동시에 가져왔는지 다시 한번 생각한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