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우물] 요나서의 가르침

(가톨릭신문)

흔히 예언서 안에서 주류를 이루는 신탁, 즉 예언자가 전해주는 하느님 말씀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에게 내렸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요나 1,1-2) 그러나 요나는 말없이 주님 말씀을 등지고 야포로 가서 타르시스로 가는 이방인의 배에 오릅니다.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요나 1,3)


한편, 뱃사람들과 니네베 주민들은 바삐 대비하고 행동합니다. 폭풍이 일어 생사가 위태로워지자, 선장이 배 밑창에 누워 깊은 잠에 빠진 요나에게 외칩니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요나 1,6) 이렇게 그들은 요나에 비해 훨씬 적극적이고도 하느님 뜻에 순응하는 듯 움직입니다.


거친 풍랑 속에서 큰 물고기에게 통째로 먹힌 요나는 그 물고기 배 속에서 주 하느님께 있는 힘을 다해 기도드리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신비의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저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요나 2,3) 기도 중에 요나는 깨닫습니다. “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요나 2,10)


요나는 두 가지를 체험하며 배웁니다. 첫째 가르침은, 예언자로서 선포해야 할 사명이 너무 버거워서 겁에 질려 말(선포)을 못 한다 해도 그의 존재만으로도 주님 말씀이 효력을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분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반벙어리’가 된 요나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바다도 큰 물고기도 바람도 뱃사공들도 다 덜덜 떨게 하십니다.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요나 1,15) 이를 본 “(뱃)사람들은 주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요나 1,16)


요나서의 또 다른 가르침은 주 하느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뿐 아니라 니네베 사람들 곧 이방인들도 아끼시고 구원하신다는 ‘하느님 보편 구원 의지’의 계시입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요나 3,3)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요나 4,11) 위에서 ‘사흘’은 충만의 숫자이며 ‘십이만’은 수학적 또는 통계수치를 뛰어넘는, 주님의 보편 구원 의지를 돋보이게 하는 상징적 수요 구원의 숫자입니다.


저는 요나서를 읽을 적마다 더없이 따뜻하고 가슴 뭉클한 인간애를 느낍니다. 요나를 살리고자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이방인들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니 얼마나 감동입니까? “(뱃)사람들은 뭍으로 되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저었으나,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져 어쩔 수가 없었다.”(요나 1,13) 그때 사공들의 주님을 향한 부르짖음은 또 어땠습니까? 생사가 오가는 위기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과연 그것은 참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아, 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부디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요나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