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에 대하여

(가톨릭신문)

만물은 변한다. 변한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이고, 움직인다는 것은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작용한다는 뜻이다. 물리학에서는 자전거를 움직이고 돌을 들어 올릴 때, 이 물체에 가한 물리량(길이, 시간 등)을 ‘힘’이라고 한다.


힘에는 방향성도 있다. 수레를 미는 힘과 끄는 힘은 양적으로는 같지만, 방향이 다르다. 물체를 서로 잡아당기는 인력이 있는가 하면, 서로 밀어내는 척력도 있다. 같은 힘으로 건물을 지어 올리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크기는 같은데 살리는 힘과 죽이는 힘이 있다. 권력이나 재력 같은 힘도 있다. 돈, 지위, 명예 등을 기반으로 인간관계에 작용하는 힘들이다. 무력은 개인이나 집단의 공격력이나 방어력으로 나타난다. 권력, 재력, 무력 등을 기반으로 국력의 크기도 정해진다. 현실에서 보통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힘들이다.


이 힘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크기를 앞세워 경쟁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크기와 세기로 우열을 매기니, 위계가 생기고, 차별을 당연시한다. 너를 누르고 내가 올라가려 애쓴다. 저마다 힘들을 경쟁적으로 키워간다. 그런데 그럴수록 키우는 사람도 불안해진다. 안보를 추구하는데 도리어 불안해지는 ‘안보 불안’의 역설은 자기를 위한 힘들을 나만이 아닌 모두가 쌓아가는 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다.


어디 그뿐이던가. 하나를 만들면 둘을 더 만들라며 재촉하는 성과 지향 사회의 요구, 자유경쟁을 내세운 신자유주의의 속박, 인공지능을 키울수록 ‘인간지능’은 밀려나는 모순은 계속 증폭된다. 근시안적인 인간은 이 힘을 이용해 짧은 성과를 누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힘에 속박되어 간다. 비인간 존재까지 죽임의 세계로 몰아간다. 희망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어떤 힘을 어떤 방향으로 추구해야 할 것인가.


물리학자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는 모든 힘은 단일하고 보편적인 힘의 여러 형태라고 생각했다. 물체의 속성을 갖지 않으면서 물체보다 앞서 주어져 있는 거대한 실재가 물체의 변화를 일으킨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물체를 물체 되게 해주는 ‘장이론(Field Theory)’으로 발전시켰다. ‘힘의 장’이 개별 자연 사건들로 현시한다는 것이다. 대문자 ‘힘(Force)’ 안에서 소문자 ‘힘들(forces)’이 드러나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물리학은 힘의 구조와 원리에 대해서는 해명하지만, 가치와 방향까지 묻지는 않는다. 그에 비해 힘의 가치를 묻고 그 가치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이들도 있다. 만물을 움직이는 힘에서 옳은 가치를 찾고 구체화하려는 운동도 지속되어 왔다. 종교가 대표적인 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거대한 힘의 장에서 보편과 공평이라는 가치를 보고, 차별과 소외를 넘어서라는 요청이다.


하느님의 힘 안에는 선과 악, 의와 불의의 이분법이 없으니, 누군가에 의한 죽임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큼도 작음도, 많음도 적음도 온전한 하느님의 세계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온갖 생명들을 살리는, 생명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런 원리를 깨닫고 타자의 죽임이 아닌 모두의 살림의 길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 부활 대축일의 메시지일 것이다.


부활은 남을 죽이고 자신만 사는 이에게 적용되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해와 비는 모든 이에게 비추고 내린다는 원천적 사실을 드러내는 삶이 부활의 삶이다. 하느님은 죽이는 힘이 아닌 살리는 힘이기에 그렇다.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