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법(法)은 더 이상 시민을 보호하는 ‘안전한 울타리’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법적 정서는 신뢰보다는 불신과 냉소에 가깝다. 특히 사법농단 사태와 검찰권의 자의적 오용 사례를 목격하며 국민이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실망을 넘어선 ‘원초적 공포’다. 법이 권력을 쥔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도구로 전락하거나, 특정 대상을 압박하는 서슬 퍼런 칼날이 될 때, 법치주의의 근간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법의 수중에서 가급적 멀리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라는 부정적 태도는 바로 이러한 법적 안정성의 파괴에서 기인한다.
법은 본래 인간의 자유를 보호하고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다. 그러나 현실의 법은 종종 그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억압의 사슬’로 변질된다. 이러한 시대적 위기 앞에서 우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고전적 지혜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그는 법의 타락을 준엄하게 꾸짖으면서도, 법이 인간의 완성을 위해 왜 필수적인지를 ‘이성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논증한다.
법의 정의(定義): 공동선을 향한 이성의 명령
토마스는 법을 단순히 권력자의 변덕이나 힘의 산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법에 대한 고전적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법은 공동선을 위해 공동체를 책임지는 자에 의해 공포된 이성의 명령이다.”(I-II,90,4) 이 정의는 법이 법답기 위해 갖추어야 할 네 가지 필수 요소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첫째, 법은 ‘이성의 명령(rationis ordinatio)’이어야 한다. 법은 인간 행위의 ‘규칙과 척도(regula et mensura)’이며, 인간을 목적지로 이끄는 것은 이성의 고유한 임무다.
둘째, 법의 목적은 ‘공동선(bonum commune)’에 있다. 법은 특정 개인의 사익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행복과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협력과 연대가 없이는 자신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고 문화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도 없다.
셋째, 법은 ‘공동체를 책임지는 권위’에 의해 제정되어야 한다. 사적 개인이 타인에게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은 법이 될 수 없으며, 오직 공동체의 안녕을 책임지는 합법적 권위자만이 법을 세울 수 있다. 마지막으로 법은 반드시 ‘공표(promulgatio)’되어야 한다. 법이 구속력을 갖기 위해서는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에게 그 내용이 명확히 전달되는 절차가 필수적이다. 밀실에서 만들어진 법이나 불투명한 법 집행은 결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왜 인간은 법이 필요한가?
토마스는 보편적인 ‘자연법(lex naturalis)’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한데, 왜 인간이 직접 제정하는 ‘인정법(人定法, lex humana)’이 필요할까? 여기에는 자연법의 ‘실천적 결핍’이라는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자연법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매우 추상적인 제1원리를 제공할 뿐, 구체적인 현실의 갈등을 해결하는 세부 지침을 모두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본성적으로 덕을 향한 성향을 지니고 있으나, 그 완성은 오직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아니기에, 특히 악습으로 기울기 쉬운 이들에게는 ‘형벌의 두려움’을 동반한 법적 규율이 필요하다. 그러나 법의 궁극적 목적은 처벌 그 자체가 아니다.
토마스에 따르면, 반항하고 악습으로 기울며 말로는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 이들을, 힘과 공포로라도 악에서 끌어내야 한다. 그들이 악을 중단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삶을 평온하게 하고 또한 그들 자신이 이에 습관을 들여, 처음에는 두려움에서 행하던 것을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행하는 데에 이르고 덕을 지닌 자들이 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I-II,95,1) 즉, 인정법은 인간을 타율적 복종에서 자율적 자유로 인도하는 훈련장이다.
‘법’은 자유·존엄 지키는 안전망이자 권력의 자의성 방지하는 장치
‘처벌’의 수단이 아니라 자유 누릴 수 있게 하는 ‘보호막’ 역할 해야
특히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모든 것을 재판관의 결정에 맡기기보다 법으로 명문화하는 것이 더 낫다’(I-II,95,1,ad2)고 주장했다. 이는 현대 ‘법치주의’의 핵심과 닿아 있다. 사실 수많은 개별 사건을 올바르게 판단할 만큼 현명한 재판관을 매번 찾기보다, 지혜로운 소수가 숙고하여 보편적인 법을 만드는 것이 훨씬 용이하다.
또한 법을 만드는 입법자는 시간적 여유를 두고 미래의 일들을 추상적·냉철하게 숙고하지만, 재판관은 눈앞의 사건을 다루며 급박하게 판단해야 한다.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 재판관은 순간의 정념(사랑이나 미움)에 휘둘리기 쉽다. 즉, 법은 개인의 변덕이 아닌 ‘축적된 이성’의 산물로서 사법 권력의 자의성을 방지하는 유일한 보루이다.
그러나 인정법이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본질적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토마스는 성 이시도로(St. Isidorus)의 기준을 빌려, 인정법이 ‘명예롭고 정의로우며 본성에 따라 가능하고 국가의 관습과도 맞으며 때와 장소에 잘 맞고 필연적이며, 유익하고 명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I-II,95,3) 그러나 그는 법이 모든 악습을 금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살인이나 절도처럼 공동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중대한 악습에 집중하는 ‘절제의 원리’를 지킬 때, 법은 비로소 시민의 자발적인 덕행을 돕는 가이드가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법은 인간의 자유를 옥죄는 굴레가 아니라 우리가 목적지인 행복에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법적 냉소와 불신은 법이 그 본연의 목적인 공동선과 이성적 질서를 망각했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적 결과다. 토마스의 가르침은 법이 단순한 ‘처벌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덕으로 이끄는 길잡이’여야 함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법은 사람을 가두는 창살이 아니라, 인간이 목적지인 행복을 향해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보호막이 되어야 한다. 물론 법은 우리 모두를 단숨에 성인(聖人)으로 만드는 장치가 아니다. 다만 타인의 평화를 방해하지 않는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함으로써, 각자가 성숙한 삶과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신뢰의 토대이다. 정당한 법은 자유의 적이 아니라, 인간이 그 안에서 자신의 자유를 뿌리내리고 꽃피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튼튼한 울타리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