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앎은 믿음을 요구한다

(가톨릭신문)

근대의 학문 이론은 앎과 믿음이 서로 보완하고 의존한다는 통찰에 이른다. 앎과 믿음은 고유한 영역을 지니면서도, 서로 필요로 한다. 믿음 없는 앎은 오만이요, 앎을 포기한 믿음은 맹신이다. 앎이 믿음을 요구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 이성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이성의 인식 능력과 용어 파악 능력을 신뢰한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이 근본적인 믿음 없이는 어떠한 지식도 성립할 수 없다.

둘째, 학문은 주로 경험이나 실험을 통해 얻은 통찰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적이며, 단지 지금까지의 관찰 결과가 그랬다고 해서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물체를 놓으면 아래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수없이 경험하며 ‘중력 법칙’을 배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인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시공간에서 물체가 반드시 동일하게 떨어질 것이라고 100%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력의 보편성을 믿는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적 지식조차 실제로는 세계의 질서가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라는 ‘자연의 일관성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어떤 학자도 자기의 분야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지 않고, 동료 학자들의 정보에 기댄다. 이는 신뢰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의학과 과학의 발전은 이성의 실험 정신만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협력과 신뢰, 앞선 세대와 현세대의 협력과 신뢰가 바탕이 된 것이다.

넷째, 지식은 실재의 이해에 방향을 맞추고, 원인 중의 원인이자, 개별 실재를 초월하는 존재의 마지막 원천을 추구한다. 이 마지막 원천은 경험적으로 체험될 수 없고, 오직 신뢰에 기초한 인격적 관심을 요구한다. 이 마지막 원천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세계관과 종교관이 달라진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실재를 ‘무(無)’, ‘제일원인(第一原因)’, ‘궁극적 실재’라고 객관적으로 부르고 여기서 멈추면, 존재의 신비 앞에서 서성이는 철학자나 지식인이 된다. 그러나 이 실재에 대하여 ‘신(神)’, ‘하느님’이라고 부르면서 인간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신앙을 가지고 들어가는 사람은 신학자나 신앙인이 되며, 지식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얻게 된다.

결국 인간의 지식과 존재 추구가 그 마지막 정점에 다다르면, 이제는 증명을 넘어선 인격적 응답과 신뢰를 마주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이론적 동의가 아니라 존재 전체를 건 인격적 투신을 요구하는 영역이다. 

가르멜의 성녀 대데레사(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은 바로 이 지점에서 큰 믿음을 발휘하였다. 그들은 감각의 밤과 영의 밤이라는 처절한 자기 비움을 지나, 큰 믿음을 가지고 존재의 궁극적 원천인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이들의 삶과 체험은 앎의 끝에서 시작되는 믿음이 결코 허황된 집착이 아니라, 실재에 도달하는 가장 확실한 길임을 증명해 준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