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그리스도교가 기존의 서구 중심 체계를 탈피하는 흐름 속, 아시아 고유의 역사, 문화, 정체성에 뿌리내린 신학적 성찰이 보편교회 쇄신의 새로운 동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필리핀의 대표적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 애그니스 M. 브라잴 교수(마닐라 드 라 살 대학교)는 서구 식민 지배의 상처와 독재, 토착 여성들의 삶을 바탕으로 동남아시아 맥락의 해방-탈식민 신학관을 구축해 왔다.
세계주교시노드 연구위원 및 교황청 각종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로 활동하며, 로마 가톨릭의 중심에서 비(非)서구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해 온 브라잴 교수는 가난한 이들과 이주민, 폭력 피해자 등 주변화된 이들을 단순한 사목 대상이 아닌 ‘신학의 주체’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구 신학의 수용을 넘어 비(非)백인 교회가 주체적 언어로 신학을 펼쳐가야 한다는 그의 제언은, 양극화와 사회적 분열 속에서 주변부의 눈으로 진실을 분별할 것을 요청받는 한국교회와 가톨릭 언론에도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진다. 신학의 ''주체’ 전환과 시노드 교회의 미래 방향을 브라잴 교수에게 직접 들어봤다.

Q. 교수님의 신학은 동남아시아의 고유한 역사·문화와 신앙 경험에 뿌리를 둡니다. 서구 신학에 익숙한 신자들에게 아시아 맥락의 신학이란 어떤 것인가요? 또 어떤 역사적 경험이 교수님의 해방-탈식민 신학관을 형성했는지 들려주세요.
A. 필리핀은 식민 지배의 깊은 상처를 겪었고, 정치적 독립 뒤에도 그 영향은 사고와 예배 방식 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 맥락의 신학이란 정신과 신앙을 함께 탈식민화하는 여정이에요. 식민지 이전의 과거를 낭만화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한때 무시됐지만 오늘날 회복력과 풍요로운 삶의 자원이 되는 아시아 고유의 지혜와 전통, 그 생명을 북돋는 보물을 되찾자는 것이죠.
저의 접근은 불평등한 구조를 비판하고, 식민주의 사고에서 벗어나며, 신학 지식을 탈식민화하려는 해방-탈식민 윤리입니다.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루카복음 4장 18절의 예수님 사명과 맞닿아 있어요.
제 신학을 형성한 주요한 상처 중 하나는 토착 여성(무헤르 인디헤나)들의 투쟁입니다. 식민 시대 이전 필리핀 사회는 양성이 비교적 평등했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종교적 권리와 지도력은 여성 종교 지도자 ‘바바일란’에 대한 억압으로 상실됐죠. 그들은 식민 지배에 맞선 원형적 페미니스트였어요. 필리핀의 페미니즘은 서구 수입품이 아니라 이들의 투쟁 안에 자생적으로 뿌리내린 씨앗입니다.
또 하나는 마르코스 독재 경험입니다. 저는 1972년 계엄 통치가 시작됐을 때 학생이었던 ‘데카다 세텐타(70년대 세대)’입니다. 1980년대에는 코코넛 소작농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체포됐고, 필리핀 주교회의의 시민 불복종 호소문을 학생들이 배포하도록 도왔다는 이유로 대학 캠퍼스 사목자 자리에서 해임되기도 했어요. ‘피플 파워 혁명(1986년 마르코스의 독재 정권을 평화적으로 무너뜨린 민주화 운동)’의 증인이자 참여자로서, 아무리 상황이 암울해도 부활과 해방의 약속 안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Q. 아시아 교회는 오랫동안 유럽과 북미의 신학 언어를 받아들여 왔습니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 그리스도인이 소수자인 상황인데, 아시아 교회가 보편교회 신학 쇄신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요?
A. 필리핀과 동티모르를 제외하면 대다수 아시아 국가에서 그리스도인은 소수자입니다. 그래서 지역 문화를 형성해 온 타종교들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지키려다 보니, 도리어 유럽적 범주와 문화에 뿌리내린 믿음과 실천에 거리를 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나 아시아 교회는 더 큰 용기를 내야 합니다. 민족 고유의 언어와 문화로 신학을 연구하고 예배하며, 당당하게 교회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특히 아시아 교회는 오랜 다종교 환경에서 쌓아온 종교 간 대화의 경험, 아시아의 비이원론적 철학들과 만나는 지점에서 보편교회 신학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죠.

Q. 교수님은 가난한 이들, 이주민, 여성, 토착민 공동체 등 주변부 사람들을 신학의 주체로 봐야 한다고 강조해 오셨습니다. 이들을 동반자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며, ''경청''이 단순한 상징을 넘어 실제 구체적인 변화로 이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A. 주변부에 있는 이들의 상처에는 우리가 생각하고 찬양(Worship)하고 살아가는 방식에서 무엇이 잘못돼 있는지를 일깨우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체제의 혜택을 받는 이들과만 이야기하면 놓칠 진실들이 그 안에 있죠. 단순히 그들의 목소리를 듣거나 ‘끼워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당사자를 동반자로 맞이하지 않는 경청은 시혜적 연민에 그칠 위험이 있어요.
이들에게 실질적인 권한과 힘을 실어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주변부 출신이나 그동안 목소리가 묻혔던 공동체 구성원을 훈련시켜 서품을 주거나, 이들이 평신도로서 교회의 다양한 기구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양성된 평신도가 참여하는 사목평의회도 단순 자문기구가 아니라 공동체의 장기적 계획을 담당하는 의결기구가 돼야 해요.
특히 여성과 평신도에게 신학교육의 문을 넓게 열어야 하고, 신학적으로 훈련받은 이들이 강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필리핀에서 사제 대 신자 비율은 1대 7000에 달하지만, 종신부제를 양성하는 교구는 적고 여성 부제 가능성에 열려 있는 교구는 더 드뭅니다. 교회 안에는 사제보다 더 잘 강론할 수 있는 평신도들이 존재하고 많은 신자가 이를 지지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강론을 서품 직무자에게만 제한하고 있어요. 교회가 저마다의 은사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려면 여성과 평신도가 교회의 의사결정 기구와 사목 현장에 대표로 참여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단계에서 경청이 이뤄질 때 비로소 참된 교회적 식별과 회심이 이루어집니다.
Q. 이주민 이슈는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주민을 시혜 대상이 아닌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을 새롭게 하는 주체로 바라보는 ‘상호문화적 교회’란 어떤 모습일까요?
A. 교회는 역사를 돌아보며 이주민의 유입이 교회를 어떻게 풍요롭게 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신학자 제후 핸슬스(Jehu Hanciles)는 저서 「Migration and the Making of Global Christianity(이주와 세계 그리스도교의 형성, 국내 미출판)」에서 이주가 그리스도교 확산과 신학적 발전의 중심축이었다고 밝혔죠. 이주민 당사자들이 본당과 교구 리더십에 참여해야 그들의 문화가 지닌 은사와 지혜도 온전히 나눌 수 있습니다.
단지 여러 문화를 한 곳에 모아놓기만 하는 다문화 모델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상호문화성은 다문화주의가 빠지기 쉬운 고립에 저항하며, 현지인과 다양한 이주민 집단 사이의 대화를 요구합니다. 상호문화적 교회는 문화 간 경계를 넘나들며 소통하는 사목자들이 이끌고, 이주민과 그 자녀들이 리더십 안에서 삶의 지혜를 나눌 때 비로소 성장합니다.
Q. 세속화와 불평등, 저출생과 사회적 분열을 겪는 오늘날 한국에서 가톨릭 언론과 교회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며, 어떠한 소명을 지니고 있을까요?
A. 한국이 겪는 변화는 세계 자본주의 구조와 연결돼 있습니다. 세계 자본주의는 부와 소득의 불평등을 확대해 양극화와 사회적 분열을 부추겼죠. 한국교회는 표면적 문제 아래의 근본 원인을 물어야 합니다. 세속화와 불평등, 저출생과 청년 불안을 밀어붙이는 경제·정치·환경 세력은 누구인가, 교회는 신학과 실천 속에서 대안적인 은총의 구조를 사회에 어떻게 세울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진실이 힘을 잃은 시대에 가톨릭 언론은 신자들이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는 안목과 힘을 길러줘야 합니다. 또 현실을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해야 해요. 허위 정보로 이익을 얻는 세력이 정치인이든 거대 기술 기업이든, 용기와 연민으로써,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는 일은 아무리 작아도 헛되지 않습니다. 성서학자 톰 라이트 주교(성공회)의 말처럼 “머지않아 불에 던져질 위대한 그림을 보수하는 것이 아니며, 곧 파헤쳐질 정원에 장미를 심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하느님의 새로운 세상의 일부가 될 일을 우리는 성취하고 있는 것”(「마침내 드러난 하느님 나라」 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실된 연대는 하느님의 새 세계까지 이어지고, 그곳에서 더욱 완성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