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고 보면 된다”와 “~라고 성경에 써 있다”

(가톨릭신문)

TV에서 어떤 전문가가 정치 상황을 분석하며 ‘~라고 보시면 됩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이다’가 아니라 ‘~라고 보면 된다’니, 왜 이런 식의 발언을 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이것은 자기 발언의 판단을 시청자에게 맡김으로써, 말하는 이의 책임을 유보하거나 회피하는 화법이다. 말에 퇴로를 열어둠으로써 본인의 책임을 흐릿하게 하고, 최종 해석은 그렇게 ‘본 이’의 몫으로 전가하려는 언어적 호신술이다.

발언의 주도권은 자기에게 있으면서도 마치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식의 유연한 권위주의 화법이기도 하다. ‘내가 기준을 정할 테니 넌 내 말을 받아들이면 돼’라는 오만함의 표현일 수도 있고, ‘사실은 나도 확신이 없다’는 암묵적 고백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화법은 발언의 신뢰성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 있다.

‘~라는 말씀을 드립니다’에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들어있다. 가령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는 ‘죄송하다는 사과의 감정’이 아닌, ‘죄송하다고 말하는 행위’에 초점을 둔다. 마치 제3자처럼, 자신의 진짜 감정은 괄호에 치고, 형식적 의무에 따라 사과의 형태만 취하는 감정의 외주화로 보인다. 말과 달리 사과받는 대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무의식의 표출일 수도 있다. 이런 거리감 때문에 듣는 이는 ‘저 사람이 정말 사과하고 있는 걸까’ 의심하게 된다.

이때 한 가지 ‘신앙적’ 질문이 생긴다. ‘~라고 보시면 됩니다’와 ‘~라고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리스도인은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종종 한다. 가령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는 예수님 말의 내심에는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해’, ‘예수님이나 가능하지 보통 사람은…’이라는 은근한 불신과 회피가 있는 것 아닐까. 정말 믿거나 깨달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나 문헌에 기대지 않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자신의 언어로 분명히 말하기 때문이다.

‘~라고 성경에 쓰여 있다’는 말에는 ‘나는 사실을 전달했을 뿐, 성경의 내용을 수용하는 것은 너의 몫이야’라는 내적 의도가 담겨 있을 수 있다. 그가 성경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아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살지 않아도,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정보를 전달할 것일 뿐이니까. 성경의 내용과 자기의 삶 간에 일부 거리를 두는 화법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라고 성경에 써있다’는 식의 발언은 일종의 정보는 되어도, 듣는 이의 몸과 마음까지 움직이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그에 비해 ‘~이다’라는 단정적 언어는 한편에서 건방지거나 교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단언하는 이의 내면에서 진리의 힘 같은 것이 느껴질 수도 있다. 정말 깨달은 사람은 그저 정보 전달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역술인은 내담자에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며 어설프게 말하지 않는다. 비교적 자신 있게 말한다. 역술인의 발언이 결과적으로 틀릴 수도 있지만, 내담자는 역술인의 명확한 말에서 판단의 근거와 위로를 얻는다. 역술인의 판단이 옳다는 확신이 들면 역술인 자체를 신뢰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이런 심리를 반영하며 신종교가 탄생하기도 한다.

성경이나 교회 문헌에 기댄 언어는 일단 안정적이다. 하지만 큰 힘은 없다. 듣는 이를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은 말하는 이의 분명한 주체성과 겸손한 자신감에서 나온다. 누군가 ‘~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듣는 이가 거기서 진리의 기운까지 느끼면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고 몸까지 움직인다. 누군가 주체적으로 힘 있게 말하고 듣는 이가 거기서 자신감과 겸손함을 동시에 느낀다면, 그것이 진리가 작동하는 대화방식이 아닐까. 예수님의 대화법이 그랬으니까.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