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만난 복음] 순교자 성월에 기억할 분들

(가톨릭신문)

1950년 4월 15일,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는 고(故) 노기남(바오로) 주교 주례로 9명의 신학생이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중에 어린 시절부터 큰 어려움을 겪었던 이현종(야고보) 신학생도 있었습니다. 1922년생이었던 그는 두 살 무렵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도 집을 떠나면서 숙부와 고모들의 손에서 자랐고, 그 안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결국 사제품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사제가 된 이현종 신학생은 4월 22일 서울대교구 도림동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불과 두 달 뒤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그리고 6월 28일 상황이 급격히 악회하자 이현종 신부는 주임신부와 함께 서울을 떠나 수원교구 하우현성당으로 피신합니다. 하지만 이 신부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임신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림동성당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성당에 남아 복사였던 서봉구(마리노) 형제와 함께 사제관을 지키며 남아 있던 신자들의 피난과 신앙생활을 함께 도왔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 7월 3일 오후 3시경 북한군 30여 명이 성당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때 한 군인이 제의실 앞에 있던 이 신부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이에 이 신부는 “이 성당의 신부요”라고 답을 합니다.

그 답이 끝남과 동시에 북한군은 총을 쏘았습니다. 그렇게 쓰러지면서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죽이는 게 그렇게 원이라면 더 쏘시오. 당신들이 내 육신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오.” 이 말에 북한군은 다시 총을 쏘았고, 총성에 성당에서 뛰어나왔던 서봉구 형제에게도 북한군은 총을 쏘았습니다.

북한군이 떠난 뒤 인근 주민들이 성당에 도착했을 때, 서 형제는 이미 숨졌고, 이 신부는 아직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신부님은 자기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자신보다 먼저 서 형제를 걱정하며 “서봉구가 죽었으니 그를 위해 기도해 주고, 고모에게 연락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는 103위 순교성인과 124위 순교복자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분들은 모두 조선 시대에 순교하신 분들입니다. 해방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에 순교하신 분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평양교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에 대한 시복시성 운동을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아직 홍보와 관심 부족으로 진행이 더딘 것이 현실입니다. 더구나 북에서 돌아가신 분들은 유해도 찾을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번 순교자 성월에는 이분들을 먼저 기억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리고 아직도 신앙의 자유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침묵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어떨지 생각합니다.

글 _ 허현 요한 세례자 신부(수원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