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은 땅에 떨어진 용의 모방체(模倣體)다. 하느님 백성을 괴롭히고 박해하는 용이 땅으로 떨어져 나타나는 게 짐승이다. 하여, 우리는 짐승에게서 하느님 백성을 괴롭히고 박해하는 용의 역할을 또한 발견할 것이다. 용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자기 권능과 왕좌와 큰 권한을 주었다.(묵시 13,2 참조) 용과 짐승은 그 호칭이 다를 뿐, 실은 하나의 형상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용은 땅에서는 짐승이다.
짐승은 열 개의 뿔과 일곱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짐승은 표범 같고, 발은 곰의 발 같았으며, 입은 사자의 입과 같다. 다니엘서 7장이 소개하는 네 마리 짐승의 모습이 요한묵시록 13장의 짐승 위에 어른거린다. 다니엘서 7장은 바다에서 올라온 네 마리 짐승을 소개하는데, 네 마리 짐승은 사자, 곰, 표범을 닮았고, 네 마리 짐승의 머리를 다 합하면 일곱이며, 뿔은 열 개가 된다.
네 마리 짐승은 주로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에 적대적인 네 왕국, 그러니까. 바빌론,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으로 해석한다. 다니엘서 7장이든 요한묵시록 13장이든 짐승이 등장하는 공간이 바다여서 태초의 바다, 창조의 섭리를 거스르는 혼돈의 바다와 연결해서 해석하기도 한다.(창세 1,2; 시편 74,13-14; 89,10-11 참조) 유다 전통은 바다의 괴물 레비아탄을 하느님과의 대립 구도 속에서 악의 형상으로 이해하기도 했다.(에녹 60,7-8; 4에즈 6,49-52; 2바룩 29,4 참조) 짐승은 아무래도 하느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요한 묵시록의 작성 시기를 참작해서 짐승을 로마 황제들과 연결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짐승의 일곱 머리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베스파시아누스 그리고 티투스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머리 중 하나는 상처를 입었으나 그 상처는 나았는데(묵시 13,3 참조) 이 머리를 네로 황제라고 여기기도 한다. 1세기 말엽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네로와 관련된 전설이 하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혔던 네로는 68년 자살했으나 죽음을 피해 다시 살아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것이라는 두려운 전설이 있었다.
짐승을 두고 역사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에 우리는 익숙하다. 그러나 또한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가령, 짐승을 로마 제국으로 이해하는 건, 마치 악의 가시적 형태가 로마였다는, 그리하여 로마는 묻고 따질 필요 없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세력으로 치부하는 일은, 설사 그것이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생각한 바였다 하더라도, 오늘 성경을 읽는 우리의 해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로마로 여행 가고 싶어 하고, 로마의 찬란한 문화를 열광적으로 칭송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하느님을 대적하는 짐승으로 로마를 이해하는 해석은 굉장히 민망한 일이다.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악의 형상들을 역사 속 특정 부류, 특정 민족, 특정 계급, 특정 인물에 투사하는 해석은 불행히도 그치지 않고 반복된다.
1세기 말 요한 묵시록의 시간은 로마에 의한 억압이 그리스도인들에겐 위협이 되었던 시간이었고, 그 위협을 짐승을 통해 ‘해석’했다. 이 ‘해석’은 ‘주석’(註釋)과 다르다. 짐승의 의미를 캐묻는 ‘주석’이 하느님과 대립하는 악의 세력으로 짐승을 규정했다면, 그 짐승에 대한 ‘해석’은 해석 주체, 그러니까 읽는 독자들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이들을 가리켜 악의 세력이라고, 짐승이라고 말하는 건 전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해석 주체의 주관적 판단이라는 것. 1세기 말엽의 그리스도인들은 요한 묵시록을 읽으면서 짐승을 악의 세력이라고 규정한 주석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로마의 위협이 곧 악의 세력, 짐승의 위협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짐승은 하느님 대적하는 세력
역사적 관점으로 해석하기보다 현재 우리에게 무엇인지 살피며
짐스이 경배 대상 되지 않도록 인간적 욕망 항상 경계해야
그래서 우리는 다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짐승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 악의 세력이라면(묵시 13,1 참조) 하느님을 향한 모독과 악의 성질이 오늘 우리에겐 도대체 무엇인지 묻는 해석학적 질문이 필요하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은 저 옛날 로마 황제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 신앙에 위협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그런 요소에 우리는 민감한지 먼저 물어야 한다.
요한 묵시록은 마침 짐승의 상처를 언급했다. 상처를 입어 ‘죽은 것 같다’(?? ?σφαγμ?νην)는 묘사는 요한 묵시록 5장 어린양의 것과 닮아 있다. 어린양을 모방하는 이 묘사는 짐승과 어린양을 대립 구도로 놓으면서 짐승의 ‘적그리스도’ 성격을 더욱 부각시킨다. 5장에서 어린양은 세상 모든 이를 속량하여 하느님께로 이끄는 역할을 보여준다. 그런 어린양은 천상과 지상 모든 피조물의 경배 대상이 된다.
짐승 역시 그러하다고 요한묵시록 13장은 서술한다. 온 땅이 상처가 나은 짐승에 놀라워하고 그를 따르며 경배한다. 덧붙여 사람들은 짐승에게 이렇게까지 말한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랴? 누가 이 짐승과 싸울 수 있으랴?”(묵시 13,4) 비교 불가의 권능을 칭송하는 이 문장은 하느님을 향한 경배의 전형이었다.(탈출 15,11; 신명 3,24; 시편 86,8; 113,5; 이사 40,25; 44,7 참조) 요컨대 상처를 입어 다시 살아온 짐승은 하느님과 같은 경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죽음마저 비껴간 짐승이 하느님 자리를 꿰차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면서 하느님일 수 있는 이유는, 전적으로 짐승을 대하는 사람들의 해석에 달려있었다.
성당을 다니고 신앙을 지닌다고 해서, 하느님을 제대로 경배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하느님을 절대 경배의 대상으로 말하지만, 그 하느님이란 단어 안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욕망이 뒤섞여 있을까. 하느님이 짐승이 되어버리는 일은 꽤나 쉬운 일이고, 불행히도 신앙인들 안에서 자주 목격되는 일이기도 하다. 악의 세력은 외부의 고통과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 그것이 짐승이 되는 것은 그것을 하느님으로 해석하는 우리의 욕망 때문이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