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프랑슈콩테 욘 지역의 베즐레. 해발 250m 언덕 정상의 생트 마리마들렌 바실리카를 중심으로 옛 성벽과 붉은 지붕의 석조 가옥이 언덕 아래까지 이어진다. 인구 480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중세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해 순례로 8,000명 이상이 거주할 만큼 번성했다. 현재 상스-오세르대교구 소속으로 1993년부터 예루살렘 수도공동체가 순례 사목을 맡고 있다. 바실리카와 언덕은 197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샹송(chanson)’이라고 하면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샹송은 본디 프랑스어로 ‘시’, ‘노래’라는 뜻으로 대중가요만 가리키는 건 아닙니다. 중세에는 샤를 마뉴와 롤랑 같은 영웅을 노래한 ‘무훈시(chanson de geste)’가 있었고, 십자군 참가를 호소하거나 십자군으로 떠나는 기사와 연인의 이별, 참회와 구원을 노래한 ‘십자군의 노래(chanson de croisade)’도 있었습니다.
이런 샹송들은 당대 신앙과 열망을 민중의 삶 속으로 깊숙이 전파하는 강렬한 울림이었습니다. 과거의 전쟁은 신앙적 영웅 서사시로 탄생했고, 동방을 떠난 왕과 기사들의 무용담도 다시 노래가 됐습니다. 그런 12세기 신앙의 열정이 유난히 뜨겁게 분출하던 곳이 ‘영원의 언덕’이라 불리는 베즐레(Vézelay)입니다.
언덕 정상의 생트 마리마들렌 바실리카와 숲 아래의 라코르델 프란치스코회 은수처. 1217년 성 프란치스코의 동료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프랑스 최초의 프란치스코회 공동체가 시작됐다. 베즐레에서 부르고뉴와 알프스를 지나 성 프란치스코의 고향 아시시까지 이어지는 약 1500㎞ ‘아시시의 길’이 여기서 시작된다.
작은 정착지에서 인구 8000명 도시로
지금은 인구 400여 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1146년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는 이곳에서 제2차 십자군을 호소했고, 1190년에는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 1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제3차 십자군에 함께 나서기 위해 회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왕이나 기사가 이곳에 의미를 부여한 건 아닙니다. 1000년 넘게 이어진 성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기억이 베즐레를 중세 신앙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었습니다.
파리에서 부르고뉴 방면 열차를 타고 2시간 반가량 달리면 세르미젤-베즐레역에 닿습니다. 여기서 셔틀버스가 순례자를 구릉 사이로 솟은 언덕 위의 마을인 베즐레에 데려다 줍니다. 옛 성문을 지나 붉은 지붕의 돌집 사이로 난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언덕 정상의 생트 마리마들렌 바실리카에 닿습니다. 이곳에는 9세기 중엽 부르고뉴의 귀족이 세운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마을 어귀의 낮은 곳에 자리했으나 노르만족의 침입으로 파괴된 뒤 방어하기 좋은 언덕 정상으로 옮겼습니다.
9세기 말 수도자 바딜롱이 무슬림의 침입을 피해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 있던 마리아 막달레나의 성해를 이장해 수도원 지하 소성당에 모시면서 베즐레에 변화의 바람이 붑니다. 11세기 들어 순례지로 크게 부상하면서 수도원의 위상도 달라집니다. 토지와 권리를 기부받았고, 수도원 주변에도 숙소와 상점이 들어서면서 작은 정착지는 인구 8000명이 넘는 도시로 성장합니다. 지역의 영주였던 느베르 백작, 오세르 주교와 클뤼니 수도원이 수도원 지배권을 두고 갈등을 빚을 만큼 수도원은 번성했습니다.
생트 마리마들렌 바실리카 정면. 외부 길이 약 120m의 큰 성당으로, 9세기 설립된 베네딕도회 수도원 성당이 기원이다. 1120년 화재 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본랑과 나르텍스를 재건하고 12세기 말~13세기 초 고딕 양식 제단부를 덧붙였다. 프랑스 혁명 뒤 본당 성당이 됐으며, 베네딕토 15세 교황에 의해 1920년 준 대성전으로 승격됐다.
참사의 아픔 딛고 세운 로마네스크 걸작
1120년,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을 하루 앞두고 수도원 성당에 큰불이 나서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도원은 참사를 딛고 새 성당을 지었고, 1120~1140년 오늘날 바실리카 모습을 갖춥니다.
본랑에 들어서기 전 넓은 나르텍스 중앙문 위 거대한 팀파눔은 베즐레 로마네스크 조각의 백미입니다. 사도들 가운데 두 팔을 벌린 그리스도가 앉아 계시고, 가장자리에는 당시 유럽인이 알거나 상상한 세계 여러 민족이 표현돼 있습니다. 이 모습에 산티아고를 향했던 순례자, 성지로 떠나는 기사들은 복음을 세상 민족에게 전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길을 떠났을 겁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긴 본랑을 따라 밝은 색과 어두운 색 돌이 번갈아 사용된 반원형 아치가 규칙적으로 이어집니다. 묵중한 로마네스크 공간을 지나 고딕 양식으로 단장된 제단으로 다가갈수록 벽은 높아지고 창은 커지며 내부가 환해집니다. 제단 아래 지하 소성당 안쪽에 지금도 마리아 막달레나의 성해함이 놓여 있습니다.
저녁기도 중인 예루살렘 수도공동체. 12세기 말 기존 로마네스크 제단부를 대신해 고딕 양식으로 단장했다. 높이 약 22m의 가대석과 회랑·높은 창이 본랑보다 한층 밝고 수직적인 공간을 만든다.
성해 둘러싼 논쟁, 되찾은 순례지의 명성
이곳 순례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1279년 프로방스를 지배하던 앙주 왕가의 카를로 2세가 마르세유 인근 생 막시맹라생트봄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무덤과 성해를 발견했다고 발표한 겁니다. 베즐레는 이미 9세기 말 성해가 이곳에 옮겨왔다고 하고, 생 막시맹은 무슬림 침입 때 진짜 성해를 다른 석관에 숨겼다고 주장하며 서로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가 프로방스로 건너와 생트봄 동굴에서 은수 생활을 했다는 전승이 생 막시맹에 힘을 더 보탰습니다. 여기에 앙주 왕가의 지원과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생 막시맹 성지 공인으로 순례의 중심은 남쪽으로 기웁니다. 19세기 후반에 마리아 막달레나의 성해 일부를 다시 베즐레에 모시면서 비로소 다시 순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세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왜 그렇게 큰 사랑을 받았을까. 그는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한 ‘사도들의 사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방 교회에서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여러 여성의 이미지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겹치면서,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한 ‘회개의 성인’이라는 이미지까지 확립됐습니다. 중세에 여기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난 것도 이런 맥락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중세의 성해 논쟁이 낯설게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순례자들이 베즐레 언덕을 찾은 이유가 성해 가까이에서 기도하면 도움이 된다는 믿음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어떠한 죄인도 회개를 통해 다시 그리스도를 향할 수 있다는 희망, 부활의 기쁜 소식을 다른 이와 나눠야 한다는 소명을 성인에게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순례 의미도 거기에 있을 겁니다.
<순례 팁>
※ 파리 베리시 역에서 세르미젤-베즐레 역까지 기차(TER)로 2시간 30분 소요. 역에서 베즐레 샹드부아르 광장까지 셔틀버스로 15분(매일 두 차례, 10㎞), 바실리카까지 도보로 15분. 바실리카에서 라코르델 은수처까지 도보로 15분.
※ 바실리카 미사: 주일 및 대축일 11:00, 평일 12:15 / 예루살렘 수도공동체 아침기도 8:00, 저녁기도 18:00.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마련한 2027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