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일화 간직한 국가유산 공소

(가톨릭평화신문)

전주교구 진안본당 어은동공소는 진안, 무주, 장수, 남원 지역 복음화의 못자리이다. 어은동공소 전경.

 

 

 


전주교구 진안본당 어은동공소는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을 잇는 성수산 북쪽 끝자락 진안읍 어은동길 23(죽산리 453)에 자리하고 있다.

어은동(魚隱洞)은 한자 풀이 그대로 ‘물고기가 숨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물고기는 사도 시대 초기 교회 때부터 사용하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고백의 음어였다. 물고기를 뜻하는 헬라어 ‘익티스’(ΙΧΘΥΣ)는 ‘Ιησουs Χριστοs Θεου Υιοs Σωτηρ’(예수스 크리스토스 테우 휘오스 소테르)의 단어 첫 글자를 모은 것으로, 우리말로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뜻이다.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기 그리스도인들이 이곳 해발 1059m의 성수산 북쪽 끝자락 깊은 골짜기로 숨어들어와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는 마을’을 일구고 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충청도 지역 교우들이 어은동 모시골로 숨어들어와 처음으로 교우촌을 이루었다. 그들 중 이명서(베드로)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하고,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이후 1876년 즈음 박해를 피해 산속 깊은 곳에 숨어 살던 교우들이 진안 절번덕이, 모시골, 절골, 삼바실 등지로 내려와 새 교우촌을 이룰 때 어은동 교우촌에도 많은 교우가 새로이 정착했다. 그 결과 1888년 어은동 교우촌에 전주(현 전동)본당 관할 공소가 설립됐다.

어은동공소는 당시 전주본당 관할 27개 공소 가운데 교우수가 가장 많았다. 또 교우 중 쉬는 신자가 단 한 명도 없을 만큼 신심 깊고 열심했다. 그래서 어은동공소는 1900년 9월 22일 본당으로 승격해 전주 동남부 지역 진안·무주·장수·남원 일대를 관할했다. 설립 당시 어은동본당 교우수가 999명이나 됐는데 그중 어은동 지역 교우가 189명이었다.

 

 

 

 

어은동공소의 건축 특징은 전통 한옥 형태에 삼랑식 바실리카 양식을 접목해 놓은 것이다. 전통 한옥 문과 창을 내어 내부 채광을 밝게 해 놓았다.

 

 


어은동본당에 벌어진 ‘기이한 일’ 2건

사제품을 받은 직후 어은동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양홍(스테파노, 1874~1945) 신부는 입학부터 졸업까지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가 배출한 첫 사제이며 19세기 마지막 조선 교회 사제 서품자였다. 그는 어은동본당 주임으로 재임하면서 뮈텔 주교에게 2건의 ‘기이한 일’에 대해 보고했다. 하나는 농소막에서 갓 세례를 받은 권씨의 이야기다. 그는 온 가족이 함께 세례를 받은 후 집안에 미신적인 물건을 모두 부숴버렸는데 그날 밤부터 매일 밤이면 십자고상을 둘러싼 빛이 비치면서 그 빛 가운데 작은 십자가들이 많이 나타난다고 알렸다.

또 다른 보고는 죽었다 되살아나 세례를 받고 다시 죽은 한 부인에 관한 이야기다. 어은동 인근 진안 밭므내에서 한 부인이 대세를 받으라는 가족과 교우들의 권유를 거부하고 죽었다. 그런데 입관 전 죽은 이가 되살아나 사람들에게 “빨리 세례를 주라. 그래야 내가 지옥에 빠지지 않는다”고 애원했다. 그는 “저승으로 가는 가시밭 길을 걷는데 어린아이를 안고 푸른 수건을 든 한 부인이 나타나 ‘이 길로 가면 지옥에 빠질 것이니 빨리 일어나 세례를 받으라’고 했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어은동공소 송 회장이 그에게 대세를 베풀자 그 여인은 남편에게 “내가 자식들에게 교리를 가르치지 않은 것을 깊이 뉘우친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숨을 거뒀다고 알렸다.

김양홍 신부는 1909년 2월 어은동성당에 영신(永信) 학교를 설립해 청소년 교육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사목에 대한 열정과 교우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인정받아 1931년 초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로부터 ‘전주감목대리’로 임명됐다. 그는 1937년 전주감목대리구가 지목구로 승격하면서 첫 번째 한국인 지목구장이 됐다.

어은동성당이 너무 산속 깊은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어 대구대목구는 효율적인 전교를 위해 1921년 진안 한들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고 어은동을 공소로 편입했다. 이후 어은동공소는 1947년 11월 다시 본당으로 승격됐으나 6·25전쟁이 나면서 1951년 폐쇄됐다가 1952년부터 진안본당 관할 공소가 됐다.



1909년 지어진 공소, 국가유산으로 지정돼

김양홍 신부는 1909년 3월 돌기와 지붕을 얹은 162㎡(49평) 규모의 목조 건물을 지어 그해 9월 드망즈 주교 주례로 봉헌됐다. 이 건축물이 2002년 5월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지금의 어은동공소다.

2026년 올해로 지은 지 117년이 된 어은동공소는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통 한옥 성당이다. 유럽의 삼랑식 장방형 양식을 한국 방식으로 토착화했을 뿐 아니라 전통 한옥 구조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내부 평면을 ‘십자가’(╋)처럼 이뤄 독창성을 더했다.
 

 

 

어은동공소의 건축 특징은 전통 한옥 형태에 삼랑식 바실리카 양식을 접목해 놓은 것이다. 전통 한옥 문과 창을 내어 내부 채광을 밝게 해 놓았다.

 


지붕은 돌기와를 ‘八’ 모양으로 얇게 다듬어 얹었다. 당시 교우들은 돌기와를 구하려 약 12㎞ 떨어진 백운면 백암리 미재의 험한 산속까지 들어가서 넓은 돌을 채취해 지게로 날라왔다. 내부 정면 6칸 중 오른쪽 2칸 일부를 ‘제대’로, 나머지는 ‘제의방’과 ‘사제관’으로 사용했다. 왼쪽 1칸은 남녀가 따로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로 사용했다. 그래서 건물 내부 평면이 ‘십자가’(╋) 모양을 이루고 있다.

회중석은 가운데에 기둥들을 나란히 세워 남녀 교우 자리를 구분해 놓았다. 한옥 성당 안에 유교 전통과 서양 가톨릭교회의 전례 형식이 공존하고 있다. 공소 마룻바닥은 초기에 지어진 그대로이다. 회중석 의자는 전동성당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지금의 어은동공소에는 제단과 회중석 구분이 없지만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이를 구분하는 난간이 있었다. 제단 벽에 붙여진 옛 제대도 지금의 모습과는 달랐다. 아마도 감실과 나무 촛대가 얹혀져 있는 옛 제대와 그 앞으로 나와 있는 나무 제대가 합쳐진 모습이 원형일 것이다.

 

 

어은동공소 제대.


공소 내부 양쪽 벽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장식돼 있다. 중국 상해 서가회 성 나자로 수도원 토산만 공예관에서 제작한 것이다. 황갈색과 파스텔 색조를 강조, 부드럽고 온화한 색감의 성화 인쇄본이 나무 액자 안에 보존돼 있다. 이와 똑같은 성화 인쇄본 14처가 익산 나바위성당, 장수 수분공소, 서산 상홍리공소 등에 설치돼 있다.

하지만 지금 어은동공소의 옛 제대와 십자가의 길 14처는 김양홍 신부가 홍콩에서 사들여 설치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말 어은동공소를 습격한 빨치산들에 의해 모두 파괴됐다.

노령화로 밤샘 성체조배 전통 명맥 끊겨
어은동공소는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후 보수를 거듭했다. 지붕과 기둥, 노출 서까래 등 고즈넉한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공소 마당에 지나치게 많은 성물이 소담한 공소와 어울리지 않는 듯해서 아쉬울 따름이다. 이보다 더 안타까운 건 현재 교우 20여 명이 공소의 명맥을 겨우 잇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연세 많은 어르신들이라 더 서럽다.

진안·무주·장수·남원 지역 복음화의 못자리인 어은동공소는 매주 토요일 저녁 8시부터 주일 저녁까지 24시간 밤샘 성체조배를 하는 전통이 있었다. 성체를 현시하고 저녁 기도로 시작해 침묵 속에 묵상 기도와 묵주 기도를 공소 교우들이 이어갔다. 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체 신심의 전통을 더는 어은동공소에서 볼 수 없어 무상(無常)을 느끼게 한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